본문 : 시편 27:1-4
1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
2 나의 대적자들, 나의 원수들, 저 악한 자들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다가왔다가 비틀거리며 넘어졌구나.
3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
4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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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름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소원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진정 구원받은 성도,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땅에서 품어야 할 소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품어야 할 소원을 오늘 본문에서 알려 줍니다. 이 소원을 품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소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합한 자라고 칭함을 받았던 다윗은 시편에 이렇게 자신의 소원을 말합니다. 4절입니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이것이 다윗의 소원임과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이 품어야 할 소원입니다.
다윗의 소원은 한 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말하는 주님의 집이라는 어떤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성전이라는 표현은 주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주님이 실제적으로 계시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대면하여 보며 주님과 의논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임재 속에,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이 다윗의 평생의 소원이었습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다윗은 십대 소년이었을 때 사무엘 선지자에게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고 왕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고자 소원 한적이 없었습니다.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다윗을 불러 왕으로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그러나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는 기름 부음을 받은 후에 찾아온 것은 영광이 아니라 아주 혹독한 고난이 있었습니다. 사울 왕에게 시기를 받아 사냥꾼에게 쫒기는 사슴처럼 10년이란 긴 시간을 끊임없이 광야로 도망 다녔습니다. 얼마나 심한 고난이었겠습니까? 한 사람에게 미움을 받아도 힘든데 한 나라의 왕에게 미움을 받아서 도망 다니는 삶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나를 잡아 죽이겠다고 수많은 군대들이 끊임없이 쫓아 올 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시편 27:4절의 다윗의 한가지 소원은 사울 왕에게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쫒기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간구한 소원이었습니다. 우리가 다윗의 상황에 있었다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솔직히 무엇을 소원하겠습니까? “하나님, 나를 왕이 되게 하겠다고 기름 부은지가 몇 년이 지났는데 내 모양 내 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를 괴롭히는 사울 왕을 죽여 주십시오” 혹은 “하나님 내가 더 이상 도망 다니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을 주십시오”혹은 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그런 것을 소원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내가 메마른 광야에 있어도 괜챦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어도 괜챦습니다. 사울에게 도망 다니는 신세여도 좋습니다. 단지 주님만 내 곁에 계시고 내가 주님의 얼굴을 보며 살면 됩니다. 주님만으로 만족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시기하여 왕궁에서 죽이려고 두 번이나 창을 던져 죽이려고 할 때 다윗은 사울 왕의 아들이요 자신을 생명처럼 사랑한 요나단을 의지했습니다. 요나단이 자신을 사울 왕에게 변호하고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돕고 보호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에 다윗은 아비멜렉 제사장이라면 자신을 도와 주고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집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아비멜렉 제사장이 자신을 보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고향 성읍 사람들을 의지하려고 그 성읍에 들어가 숨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 사람들이 다윗의 은혜를 저버리고 사울 왕에게 밀고 합니다. 해도 해도 안되니까 자신이 죽인 블레셋 장군 골리앗의 고향인 블레셋으로 도망하여 그곳에서 의지할 곳, 사람을 찾습니다. 얼마나 말도 되지 않는 짓입니까?
그런데 자세히 보면 우리가 바로 그런 짓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세히 보면 사람을 의지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저 집사, 저 목사, 남편, 자식을 믿고 의지하지 않습니까? 돈을 의지하고, 지위를 의지하고 …
다윗 결국 블레셋 나라에서도 죽을 고비를 넘기를 겨우 도망쳐 나옵니다. 그런 일들을 하나하나 경험하면서 다윗은 사람이 나를 돕고 나를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없는 광야로 도망합니다. 광야, 메마른 곳입니다. 힘든 곳입니다. 어려운 곳입니다. 더 이상 도움 받을 사람이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외에 의지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려고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그 광야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경험합니다. 그것을 통해 다윗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하나님만이 자신이 피할 산성, 의지할 바위, 구원자임을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하는 자가 됩니다. 긴 시간을 그 메마른 광야에서, 동굴 속에서 숨어 지내면서 그의 마음에, 그의 입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합니다. 왕이 된 것도 아니고, 메마른 광야에서 나와 궁궐로 들어간 것도 아니고, 사울 왕이 자신을 더 이상 죽이려는 마음을 버리고 다시 받아 들인 것도 아닌데 그의 마음에 평안함과 안전함과 감사함이 넘친 것이었습니다. 메마르고, 힘들고, 고난의 장소인 광야에서 평안을 느끼고 감사를 느끼고 찬양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시편 57:9-11을 보면 “내가 만민 중에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모든 나라 가운데서 노래를 불러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그 사랑, 너무 높아서 하늘에 이르고 주님의 진실하심, 구름에까지 닿습니다. 하나님 주님은 하늘 높이 높임을 받으시고 주님의 영광 온 땅위에 떨치십시오” 광야, 곧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이러한 감사와 찬양이 다윗의 마음속에서, 입술을 통해서 터져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의 광야에서 도망 다니는 삶을 살고 있는데 그의 마음에 안전함을 느끼고 감사를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광야가 편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도망 다니는 삶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속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내가 어디에 있느냐가 아닙니다. 맑은 날에 있느냐 폭풍 속에 있느냐가 아닙니다. 내 건강이 좋은가 나쁜가가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힘드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나의 경제가 아무리 어렵다고 하고, 내가 고난과 문제의 폭풍 속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얼굴과 임재를 체험하고 있기만 한다면 그곳이 바로 내 삶에 가장 안전한 장소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고난의 광야가 하나님을 가까이 갈 수 있었던 축복의 장소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고난의 광야를 걸을 때 원망하고 불평했지만 다윗은 고난의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안전함과 인도하심을 경험했기 때문에 4절에 자신의 한가지 소원을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라고 구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 메마른 광야와 어려움 속에서 도우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기에 1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 우리도 이런 확신 가운데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담대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확신과 담대함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하나님의 도움을 체험하며 살아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면 하나님의 임재를 더 갈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더 하나님의 임재를 더 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수많은 기도 제목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기도 제목과 소원을 드리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하기를 구하십시오. 그러할 때 우리의 삶이 변하게 됩니다. 담대하게 됩니다. 놀라운 하늘의 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