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22:1-8

1 “동포 여러분,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드리는 해명을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군중들은 바울이 히브리 말로 연설하는 것을 듣고, 더욱더 조용해졌다. 바울은 말을 이었다.
2 “나는 유대 사람입니다. 나는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나서, 이 도시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의 율법의 엄격한 방식을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3 그래서 나는 오늘날 여러분 모두가 그러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 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4 나는 이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여 죽이기까지 하였고,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묶어서 감옥에 넣었습니다.
5 내 말이 사실임을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가 증언하실 것입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동포들에게 보내는 공문을 받아서, 다마스쿠스로 길을 떠났습니다. 나는 거기에 있는 신도들까지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처벌을 받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6 “가다가, 정오 때쯤에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7 나는 땅바닥에 엎어졌는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8 그래서 내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나에게 대답하시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이다’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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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회생활을 할 때 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기억력입니다. 꼭 기억해야 할 것들을 잊으면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루게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와 약속한 것을 잊거나, 하겠다고 한 일을 잊으면 신뢰에 금이 갑니다. 제때에 내야 할 payment 를 잊고 늦게 내면 Late Fee, 벌금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잊는 다는 것이 다 나쁜 것만이 아닙니다. 어떤 것은 잊는 것이 축복일 때가 있습니다. 과거에 누군가에게 받았던 상처나 아픔들, 나를 화나게 했고 열 받게 했고 힘들게 했던 일들을 잊고 사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당했던 상처와 아픔들을 평생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실패했던 일들, 실수했던 일들, 좋지 않았던 일들을 기억하고 늘 씹고 묵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잊어야 할 것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하며 살아가면 그 삶은 불행해 집니다.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헤이워드 모든 성도님들은 인생을 살면서 과거의 일 가운데 기억해야 할 것들과 잊어야 할 것들을 분별하여 과거에 감사한 일들, 은혜 받은 일들, 좋았던 일들을 기억하고 잊어야 할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와 수모와 아픔들은 잊고 살아가시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잊지 않고 살았던 것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잊지 않고 기억한 것 때문에 사도 바울이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속에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님듸 은혜임을 깨달아 우리의 신앙이 열정과 굽힘없이 담대함으로 끝까지 전진해 나가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도행전 22장의 내용은 21장에서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 안까지 데리고 들어갔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의 오해를 받아서 유대인들이 잡아 죽이려는 폭동이 일어나자 로마인 천부장이 폭동 진압을 하기 위해서 바울을 잡아끌고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때 헬라말로 로마인 천부장에게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잠시 달라고 한 후에 돌아서서 자기를 죽이려고 한 유대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잘못하면 자기가 죽게된 상황인데 자기가 살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가 모든 시작은 열정으로 시작합니다. 뜨거움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연예도 처음 할 때 얼마나 뜨겁습니까?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얼마나 뜨거운 열정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합니까? 그런데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열정이 식습니다. 사랑이 식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을 보면 처음이나 나중이나 복음을 전하는 열정이 변하지 않습니다. 식지가 않습니다. 1차 선교를 처음 갈 때나 지금 3차 선교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과 뜨거움이 식지 않고 변하지 않음을 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에 두 번이나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면 붙잡혀 고난을 당할 것이다 라는 성령님이 알려주시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나는 죽어도 상관없다 라고 하며 복음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바울의 열정. 왜 사도 바울의 열정은 식지 않은 것입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또한 복음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고 끝까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그 해답이 바로 22장에 나오는 바울의 간증에서 볼 수 있습니다. 22:3절부터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유대인들에게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에서 율법을 배우고 엄격하게 그 율법대로 산 유대인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를 믿는 자들을 빅해하고 죽이고 감옥에 넣는 사람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던 중 다마스쿠스까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는 중에 예수님을 만난사건을 말합니다. 6-8절 “가다가 정오때즘에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나는 땅바닥에 엎어졌는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나에게 대답하시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이다 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고 믿게 된 순간의 사건을 간증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이 복음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복음이 잘못됐다고 윽박지르고 죽이려고 하는 상황 속에서 “당신들이 잘못알고 있고 내가 옳다” 라고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를 핍박하던 내가 어떻게 예수를 만나게 되고 믿었으며 내가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죽을때까지 복음에 대한 열정, 신앙에 대한 열정이 변하지 않고 식지 않은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바울은 주님과의 첫 만남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하며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며 자신의 삶을 나눌 때 꼭 전한 내용이 예수님이 자신을 어떻게 만나 주셨는가에 대해 말합니다. 바울이 늘 기억하고 있는 것은 과거의 자신의 모습입니다. 4절에 “나는 이 도를,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여 죽이기까지 하였고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묶어서 감옥에 넣었던” 죄인임을 기억하며 살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핍박한 사람, 아니 예수님을 핍박했던 죄인 중에 죄인이 바로 나였다는 사실을 알고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없고,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는데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와 주셨고 용서하셨고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워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쓰면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시고 구원하셨다” 라고 고백하고 우리에게도 그것을 기억하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열정이 식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자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찾아와 주시고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셨다.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를 만났다고 하고, 구원받았다고 하고, 직분을 받았다고 하는데 예수 믿은지 10-20년이 지나면 그 뜨거움과 열정은 사라지고 자기만이 이 교회에 의인이고 제대로 된 사람처럼 생각하고 다른 성도들을 판단하는 바리새인적인 신앙생활로 변합니까?

바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줄을 잊고 나를 처음 만난 그 은혜, 자격이 되지 않는 죄인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은혜를 잊고 살기 때문이 아닙니까? 내가 죄인이었음을 잊고 살 때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내가 죄인이었음을 잊지 않고 살면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면 하나님을 향한, 복음에 대한, 영혼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대한 주님의 책망이 나옵니다.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대한 책망이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2:4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라고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의 질책이 예수님께 받은 그 놀라운 사랑, 놀라운 은혜를 잊어버린 순간 우리의 신앙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식게 되어 있습니다. 형식적이고 율법주의고 종교인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첫 사랑을 잃어버린 열정이 식어버리고, 순수함과 뜨거움이 사라진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책망하시며 그 첫 사랑을 기억하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시간이 지나고 자신의 명성이 높아지고, 교회의 리더로 더 세워져 갔어도 가는 곳곳마다 죄인 된 자기를 어떻게 만나주셨는지를 간증합니다. 다시 말해서 늘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죄인 되었던 자신의 모습과 그 죄인 된 자신을 은혜로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복음 전하는 자로 세워주신 그 첫 사랑을 기억하며 살아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복음을 전하는 열정이 식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 반대와 고통이 있었지만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쉬지 않고 달려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 성도님들, 바울과 같이 죄인 되었던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부장으로, 집사로, 구역장, 인도자로, 주님의 종으로 삼아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만나 주신 예수님의 만나주심과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아가면 종교인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고 살면 종교인이 됩니다. 종교인은 믿는 다고 하지만 여저히 내가 주인이 되고 내 이익, 내 원함, 내가 중심이 되어 사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유대인들이 종교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자신들만을 위한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22:21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겠다”라는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나를 보내셨다는 말을 듣자 바울을 죽이겠다고 들고 일어납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자신들만을 위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했고 자신들만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인입니다. 죄인 된 나를 부르시고 지금도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면 종교인이 아닌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억하며 살아가십니까? 무엇을 가슴에 두고 머리에 두고 살아가십니까? 무엇을 자랑하면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신다. 나는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 라고 그리스도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만을 기억하고 살았습니다. 죄인 중의 죄인이요 죄인중의 괴수인 자신을 사랑하셔서 먼저 찾아와 죄 용서하시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종으로 삼아 주신 그 은혜만을 기억하며 살았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기억하고 늘 고백하며 살았기에 열정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나를 만나 주신 주님, 나를 이 곳에 있게 하신 주님, 나를 구원하시고 지금까지 인도하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끝까지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는 자로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ategory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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