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15:1-2
1 몇몇 사람이 유대에서 내려와서, 이렇게 신도들을 가르쳤다. “여러분이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2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충돌과 논쟁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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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사건은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이 처음으로 세운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 받아 약 2년간의 1차 선교를 다녀 온 후에 안디옥 교회에 있을 때 유대에서 온 몇몇 사람들, 분명 유대인이었을 사람들이 와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라고 주장하며 안디옥 교회 성도들을 가르치는 문제로 안디옥 교회를 담당하고 있는 바나바와 바울과 큰 충돌와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것이 1-2절의 시작입니다. “몇몇 사람이 유대에서 내려와서, 이렇게 신도들을 가르쳤다. “여러분이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충돌과 논쟁이 벌어졌다”
우리가 사도행전 13-14장을 통해서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러 도시를 다녔을 때 사단의 수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키푸르스에 가서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의 보좌관이었던 마술사 바예수의 방해가 있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할 때 회당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의 시기함으로 모함과 거부가 있었습니다.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할 때 여전히 그곳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과 은혜를 믿음으로 죄 용서함을 받는다는 복음을 율법과 할례, 선민의식 사상으로 반박하며 내 쫓아내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부터 내려온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사람들에게 돌을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정신을 잃은 바울을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내 던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막는 수많은 외부의 공격들이 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 외적인 영적인 공격, 사단의 공격, 박해와 핍박을 잘 이기고 죄 용서함을 위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길을 잘 전하여 많은 영혼들이 믿고 구원 받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15장에 들어와서는 외적인 공격이 아닌 사단이 내적인 공격을 하는 것을 봅니다. 1절에 유대에서 내려온 몇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 성도들이었습니다. 적이 아닌 동지요, 같은 사역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안디옥 교회에 와서 주장한 내용이 모세의 율법과 할례를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께 받아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은혜의 복음을 받지 않는 가르침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가르친 복음과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할례는 분명 구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라고 명하신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조건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함을 기억하며 살라고 명하신 언약의 표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준 율법, 즉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아 하나님만 예배하고, 의지하며 살라고 주신 율법을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힘으로 지킴으로 구원 받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과 바나바가 율법과 할례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으로만 죄 용서함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는 것을 듣고 안디옥 교회에까지 와서 “여러분이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라고 반박하며 바울과 바나바가 가르치는 구원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삶,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복음을 위해 살아가고 복음을 전하는 삶에는 늘 영적인 사단의 공격이 있습니다. 그 공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외부적인 공격이고 두 번째는 내적인 공격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전파되며 교회가 세워졌을 때 사도들과 교회를 공격하는 외적인 공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교회 안에 과부를 구제하는 가운데 분열과 다툼 싸움을 조장하는 내적인 공격,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지 못하게 하는 영적 공격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안디옥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으로 세워지고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전초지가 되어 더욱 힘을 내려고 할 때 사단은 안디옥 교회가 붙들고 있는 구원의 복음을 흔드는 내적공격을 한 것입니다. 사실 외적인 공격보다 더 위험한 공격이 내적인 공격입니다. 교회를 보십시오. 외적인 공격으로 무너지는 경우보다 내적으로 다투고, 싸워 무너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외적인 공격은 함께 한 마음이 되어 싸웁니다. 그러나 내적인 공격은 우리를 분열하게 하고 서로 싸우게 함으로 스스로 무너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신앙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교회에 나가거나,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게 외적으로 공격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과 생각, 즉 내적으로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내적 공격, 즉 피곤하다고,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다고 빠지게 하고, 게으름이나 핑계와 같은 내적 공격에 무너지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적으로 성도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심어 주고,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마음보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탓하는 내부적인 공격에 무너지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성도가 아닌 사단의 거짓과 계략임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에서 올라온 성도들이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 라는 가르침과 주장에 대해 강하게 맞서며 충돌했습니다. 사람이 아닌 잘못된 가르침과 주장에 대적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로부터 받은 율법과 할례를 약 1000 년간 지켜 왔던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배워왔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을 받아온 사람들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각인된 그 사상이 바뀌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바울도 바리새인으로 율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율법에 흠이 없을 정도로 지켜 왔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받아 들이기는 커녕, 율법이 아닌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전하는 성도들과 교회를 그렇게 핍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약의 모든 예언서의 말씀을 성령님의 감동함 속에 깨닫고 구원은 율법이나 할례, 또는 다른 인간의 행위와 노력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 은혜로 받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 놀라운 죄 용서함과 구원, 성령을 받았기에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받는다고 하는 주장을 강하게 맞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하나님의 선물을 거부하는 엄청난 잘못이기에 율법을 통해 구원받아야 한다는 가르침과 주장에 대해 강하게 맞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붙들어야 할 진리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나를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게 하고, 바른 믿음으로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내적인 공격이 무엇이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내가 그동안 붙들고 살아온 과거의 것들, 과거의 잘못된 행동과 습관들을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의 복음과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실 때 내려놓고 따를 수 있는 마음과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늘 기도해야 하는 기도가 “영적인 눈을 열어 주옵소서” 입니다. 내 눈을 열어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성령의 빛으로 내 마음을 비추어 더럽고 추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진리의 길,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바른 길을 담대하게 흔들리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믿음과 지혜를 달라고 늘 간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