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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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의 본문을 보면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라고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 사랑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이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를 보면 자기의 것 즉 단지 자기 이익만이 아닌 자기 권리, 자기 명예, 자기 욕심, 자신의 뜻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본성, 우리의 죄성은 나의 이익, 나의 원함, 나의 뜻, 나의 욕심을 구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이익을 우선으로 살아갈 때 다툼, 시기, 원망, 싸움, 나뉨이 생기는 이유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그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 받은 자는 나의 이익을 구하는 삶에서 벗어납니다. 고린도전서 10:31-3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여러분은 유대 사람에게도, 그리스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교회에도, 걸림돌이 되지 마십시오. 나도 모든 일을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것은, 내가 내 이로움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이로움을 추구하여,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의 기쁨 즉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삶, 나의 이익을 구하고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이로움을 위해서 나를 내려놓는 디딤돌이 되고자 하는 마음과 삶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23-24절에도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십시오” 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 자신의 생각과 뜻, 원함,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어느때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이 시대 우리들에게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십시오” 라는 이 말씀은 진부하게 들립니다. 현대는 지극히 이기적인 시대입니다. 자기에게 손해나는 일은 전혀 하지 않으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 우리에게 행하라고 하는 사랑의 모습인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십시오” 라는 사랑은 세상으로 볼 때 바보 같은 사랑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다른 사람을 위해 손해 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사실 진정 누군가를 사랑하면 바보 같은, 엄청난 손해를 보는 일들을 행합니다. 세상의 사랑 속에서도, 남녀 간의 사랑 속에서도 누군가를 진정 사랑하면 그 사람을 위해 엄청난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는 모습을 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엄청난 재물의 손해와 권리를 내려놓는 모습들을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작년에 일본의 마코 공주가 평민과 결혼하겠다고 해서 왕족으로서 공주로서 받는 수많은 특혜를 포기한 것이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를 택하기 위해 편하게 평생을 먹고 살 수 있는 자리를 박차고 궁궐을 떠난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지 않습니까? 그 외에도 사랑하는 누군가로 인해 자신의 편함과 시간, 물질과 모든 것을 포기하며 섬기는 수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 유익을 구하며 사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바보 같은 사랑입니다. 약삭빠른 사람들의 눈에 볼 때는 이해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바보 같은 사랑, 손해 보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구원 받은 우리, 성도라 불림을 받는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쉘 실버스타인이라는 분이 쓴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동화를 우리가 압니다. 사과나무와 소년은 친구 관계로 행복한 어린 시절을 함께 했습니다. 소년은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가며, 매달려 놀고 그네도 타며, 사과도 먹고, 피곤해지면 나무 그늘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소년은 물건 살돈이 필요하다고 하자 나무는 자신의 모든 사과를 가져가서 팔게 합니다. 후에 많은 세월이 지나 집이 필요하다고 하자 나무는 자신의 가지를 베어다가 집을 지으라고 합니다. 그 후에 소년은 먼 곳으로 가고 싶다고 하자 나무는 자기를 베어 배를 만들어 가라고 자신을 내어 줍니다.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어 돌아온 소년을 나무는 자신의 밑둥까지 잘린 그루터기에 앉아 쉬라고 자신을 또 다시 내어 줍니다.
간단한 이 동화는 아무런 조건 없이 자기를 내어주기만 하는 바보 같고 손해만 보는 이 나무를 보며 마음을 따스하게 뭉클하게 합니다. 자기 이익에만 몰두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이 나무가 소년에게 베푼 바보 같은 희생의 사랑이 바로 우리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십니다. 수많은 은혜와 축복, 구원과 기회를 끝없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부하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갔던 우리, 아버지의 사랑과 받은 축복을 깨닫지 못하고 아버지의 유산을 달라고 떼를 써서 먼 이방 땅에 가서 흥망진창 자신의 욕심과 쾌락을 위해 쓰고 돼지우리 안에 거하는 탕자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지 않았습니까?
그런 우리들을 미워하거나 내치지 않으시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자기의 독생자 아들을 이 땅에 보내사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과 지옥의 형벌을 십자가 위에서 고통과 피 흘림으로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 주신 그 사랑이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까? 말도 되지 않는, 우리의 머리로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절대로 줄 수 없는, 받을 수 없는 사랑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영원한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 오직 우리의 이익을 위한 사랑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바보 같은 사랑을 깨달은 사람만이 자신의 이익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아낌없는 이 사랑을 받은 자만이 자신 또한 아낌없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은 고린도전서 10장의 우상의 제물에 대한 사도 바울의 태도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기에 다 선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상이란 신은 존재하지도 않기에 그들 앞에 바친 음식은 단순한 음식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에게는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이 없이 먹을 수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이런 믿음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이것을 우상에게 바친 제물이라고 말한다면 사도 바울은 그때는 먹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나는 먹을 수 있는 믿음이 있지만 이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귀신의 제물을 먹는다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23-24절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라고 말하면서 고린도전서 8:13절에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라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과 죄성은 무엇보다, 누구보다 나 자신의 이익과 편함을 우선으로 하려고 합니다. 나의 권리, 나의 편함, 나의 자유를 빼앗기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사랑,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그러할 때마다 우리가 보여야 할 사랑이 나의 이익을 구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익, 더 나아가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나를 희생하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구하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 항상 품고 있어야 하는 마음은 나는 주님의 희생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임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 용서하시기 위해,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전부 희생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이기에 나의 삶의 목적이 나의 이익이 아닌 주님을 위해, 다른 영혼의 이익을 위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섬기는 삶이 내 삶의 목적임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마가복음 10:4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고 따르고 순종하겠다는 우리의 삶의 목적도 같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닌, 즉 자기 이익을 얻기 위함이 아닌 섬기러 오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영혼을 위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주는 것이며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사랑 역시 주는 것과 섬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섬김과 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이 있어야 결국 구원을 이룹니다. 하나됨을 이룹니다. 손해 보는 것 같고 바보 같은 것 같지만 그것이 이기는 비결이요 참된 행복과 자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임을 기억하고 나의 이익이 아닌 다른 사람과 교회와 하나님의 이익을 위해 희생과 내려놓음, 섬김과 드림의 삶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