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갈라디아서 2:14-17

14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15 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이방인 출신의 죄인이 아닙니다.
16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하심을 받으려고 하다가,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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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이 각 교회에 보낸 편지는 안부를 전하고 교회를 격려하기 위함도 있지만 그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와 어려움, 갈등이나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함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와 성도들이 가진 어려움과 잘못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난 잘못된 가르침이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에서 벗어나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유대에서 온 사람들의 가르침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 온 것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 참된 복음의 길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6절에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분에게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데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책망한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게 한 잘못된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다른 것이 아닌 율법주의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주의란 쉽게 말해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세상의 많은 종교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각 종교가 요구하고 지정하는 의식이나 의례, 예를 들어 고해성사나 미사, 예배 혹은 참선을 하는 것. 특정한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것, 코란의 계율, 예를 들어 금식이나 하루에 몇 번 기도하는 것, 성례를 참여 하는 것 또는 선한 어떤 일들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자격을 얻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우리는 율법주의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예배를 중요하게 여기고 예배나 기도의 자리에 빠지지 않고, 교회에서 섬기는 일을 하다가 보면 나름대로 내가 행하는 그러한 섬김이나 봉사, 예배가 자신의 의로 느껴지기 쉽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바로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율법주의가 들어오고 율법주의에 나도 모르게 넘어가면 다른 사람에 대한 정죄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교만함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나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만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럴 때 나오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정죄와 비판, 판단입니다.‘저러면서 무슨 집사야. 장로야. 목사야’라며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난과 험담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지나 결단이 부족하신 분들은 교회에 충성하고 빠지지 않고 봉사를 많이 하는 분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면서 나의 행위가 부족하다고 느끼며 열등감을 갖고 구원을 의심하게 됩니다. 구원과 믿음의 성숙을 자신의 행위에 의지하다보니까 늘 넘어지고 시험에 드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나는 해 봐도 안돼”라고 신앙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가 교회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6절에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분에게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데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은혜입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행위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죄악과 그 죄의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치루어 주신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이요 복음의 진리인 것입니다.

구약에 주신 600가지의 율법들은 그것을 온전하게 지켜서 너희의 힘과 능력, 노력으로 구원 받을 자격을 얻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이 거울이 되어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룰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로마서 3: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3: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라고 우리의 상태를 율법을 통해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은혜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죄 용서함을 받고, 그 은혜 때문에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더 나아가 놀라운 하늘나라를 상속 받았기에, 그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율법을 지키고 살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인해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이루고 함께 먹고 함께 지내고, 함께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놀라운 자유함과 하나됨을 이루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에 율법주의가 가만히 들어 왔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만이 아닌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방법으로 돌아가게 하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한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난 행동을 베드로 사도가 행함으로 여러 사람들이 함께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도망치는 위선을 보인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사도 바울이 보았기에 베드로 사도를 면전 앞에서, 여러 성도들 앞에서 책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다시 한번 우리가 받은 구원이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죄용서 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하심을 받으려고 하다가,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하면 결국 우리는 그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기에 다시 죄인으로 서게 될 텐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해 그들에게 전해진 것은 오직 ‘은혜’로 의로움을 얻는 복음이었는데 그들은 현재 다른 복음, 율법주의를 쫓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움으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이 사람은 된다, 안된다” 라고 하는 죄를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움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16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성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착각하게 합니다. 내가 조금 열심히 섬기고, 예배 참석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면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죄성은 늘 자신이 피해자요 다른 사람이 가해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죄성은 늘 나의 생각과 판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교만한 재판장의 자리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과 은혜를 받기 전에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복음을 받은 자,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구원 받음을 깨달은 자가 되었다면 그러한 율법주의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나는 이 정도로 살고 있으니 거룩하다. 나는 판단하고 정죄할 만하다’라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난하고 미워하는 것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요, 용서요, 사랑임을 매일 십자가의 복음 앞에 서서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만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임을 깨닫고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 그 삶이 이웃을 향하여 특별히 나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자에 대하여 목을 잡고 감옥에 던져 넣어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가 아니라 100데나리온이 아닌 천, 만 데나리온을 빚진 자라 할지라고 그 영혼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축복하는 은혜를 베푸는 자가 진정 복음을 받고 복음 안에 거하는 참된 구원 받은 자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러한 복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율법주의가 완전히 깨어지고 부서져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복음에 합당한 은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시간 기도하기 원합니다.

Category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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