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갈라디아서 3:11-18
11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으로는 아무도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12 그러나 율법은 믿음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의 일을 행하는 사람은 그 일로 살 것이다” 하였습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14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5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사람의 관례를 예로 들어서 말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적법하게 유언을 작성해 놓으면 아무도 그것을 무효로 하거나 거기에다가 어떤 것을 덧붙일 수 없습니다.
16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을 말씀하실 때에, 마치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후손들에게’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단 한 사람을 가리키는 뜻으로 ‘너의 후손에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사람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17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맺으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뒤에 생긴 율법이 이를 무효로 하여 그 약속을 폐하지 못합니다.
18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그것은 절대로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유업을 거저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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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과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구원은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즉 십자가의 복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벗어나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기 위해 율법에 대한 오해와 구원을 얻는 믿음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소환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율법을 완전하게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로마서 4:2-3절을 보면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를 통하여, 너에게 날 아들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그 민족으로 온 민족이 구원을 받게 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을 수 없는 중에 믿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고향 땅을 떠나 갈길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땅으로 떠났습니다. 2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얻지 못했습니다. 순간 순간 흔들림도 있었고 의심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다시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말씀을 주셨을 때 그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그 약속의 말을 믿었을 때 그를 의롭다고 하였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은 바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겨 주셨는데 그때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시기 400년 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율법을 주시고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닌 율법 이전에 이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셨지만 그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다면 그 율법을 따라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논리로 율법으로 구원 받음을 율법주의자들을 주장한 것입니다. 맞는 말 같습니다. 논리적으로도 맞습니다.
그러한 논리를 바울은 “약속”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사람의 관례를 예로 들어서 말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적법하게 유언을 작성해 놓으면 아무도 그것을 무효로 하거나 거기에다가 어떤 것을 덧붙일 수 없습니다”누군가 유언을 법적으로 해 놓으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무효로 하거나 그 유언에 다른 것을 더 넣을 수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만든 계약이나 약속도 그러한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즉 언약은 400년이 지난 후에 생긴 율법이 있더라도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17-8절입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맺으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뒤에 생긴 율법이 이를 무효로 하여 그 약속을 폐하지 못합니다.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그것은 절대로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유업을 거저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어진 언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겠다는 약속은 율법을 지키면 주겠다는 언약이 아니었습니다. 믿으면 주시겠다는 언약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400년 뒤에 율법을 주셨지만 아브라함의 자손들, 우리들에게도 그 언약은 지속되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구원을, 축복을 주시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하나님이실지라도 일방적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믿음으로 구원과 의롭게 되는 구원의 복을 주시겠다고 언약을 맺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율법이 더 나은 것 같다고 변경하시겠다고 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서 확정된 유언을 변경하거나 폐기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후에 생긴 율법이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왜 주셨습니까? 그것은 내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아브라함과 동일하게 믿음을 통하여 주시는 것이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함을 주신 후에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을 이루시기 위해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을 보면 얼마나 실수가 많았습니까?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해서 왕에게 아내를 빼앗기기도 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하셔서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때가 되었을 때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백세 된 아브라함에게 아기를 허락하셨고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사라의 태를 여셔서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그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완전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약속을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지키십니다. 구원을 주시고 영원한 천국에 들려 올라갈 때까지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이 놀라운 축복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이지 우리가 행하는 선한 행위, 율법을 지키는 것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언약,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에 감사함으로 사랑과 순종과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