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디모데후서 1:15-18

15 그대도 알다시피, 아시아에 있는 사람이 모두 나를 버렸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들어 있습니다.
16 주님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빕니다. 그는 여러 번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내가 쇠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17 로마에 와서는 더욱 열심으로 나를 찾아 만나 주었습니다.
18 그 날에 주님께서 그에게 자비를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대는 그가 에베소에서 얼마나 많이 봉사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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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세 사람의 이름을 말하며 그들이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15절을 보면 부겔로와 허모게네라는 두 사람을 먼저 말합니다. “그대도 알다시피, 아시아에 있는 사람이 모두 나를 버렸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들어 있습니다” 이 두 사람,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아시아에서 바울 자신을 버린 많은 사람들 가운데 대표가 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자신을 버린 사람들이라고 할 때 아시아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사역을 했던 지금의 투르키예, 즉 터어키 지역을 말합니다. 조금 더 좁게 말한다면 디모데가 목회를 하고 있는 에베소 도시 지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 즉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겠다고 하고 따른다고 하는 성도들 가운데 바울을 버린, 바울에게 등을 돌린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나를 버렸다고 하는 부겔로와 허모게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아시아 지역, 특별히 에베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가르쳤고, 그들은 그 당시 바울의 전한 복음을 듣고 믿었고 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에 간 후에 잡혀 감옥에 있다가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에 갔지만 그 당시 로마에 큰 불을 지른 네로 황제가 그 일이 기독교인들이 한 일이라고 모함하여 기독교인들에 대한 강경한 핍박이 더 해짐으로 바울이 사형 선고를 받고 로마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상황이 되자 그들은 바울에게서 돌아선 것입니다. 에베소 역시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 있는 상황이기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으로 들통나면 감옥에 갇힐 수도 있고, 재산을 빼앗길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을 알고,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사형수로 낙인 찍힌 바울을 멀리한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찾아 올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바울이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소식과 로마에서 기독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 명령과 핍박의 소식이 들려오자 아시아, 에베소에 있던 성도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바울을 버린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전하고 가르쳤던 바울이 결국 죄수로 감옥에 갇히고 사형 선고를 죽고 비참하게 죽는 것을 보고 복음에 의심을 품고 신앙을 버렸고 다른 성도들까지 복음의 신앙을 버리게 하는 일을 앞장서서 했던 대표적인 두 사람이 바로 부겔로와 허모게네였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욥기서를 보면 욥의 세 친구들이 욥이 당한 처참한 고난을 보고 그 상황으로 욥이 죄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의 처한 상황을 보고 바울이 가짜라고 생각하고 바울을 버리고 더 나아가 대적하여 다른 주의 백성들의 마음에 의심을 심어 놓은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향해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10명이 가나안 땅을 악평하고 가나안 민족의 강함을 말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약속에서 벗어나는 불신앙을 심어 주어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걸림돌이 된 사람들을 봅니다.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그러한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그들과 같이 믿음을 버리고 다른 성도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누군가의 신앙에 시험에 들게 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마음을 갖지 않도록 스스로를 돌아보아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과 사랑, 그리고 성령으로 믿음을, 복음을, 신앙을 지키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시아에, 에베소 교회에 부겔로와 허모게네와 같이 바울을 버리고, 신앙을 버린 자가 있었지만 또한 신앙을 지키고 바울에게 힘과 격려가 되는 믿음과 사랑안에 굳게 서 있는 오네시브로가 있었습니다. 16-17절입니다. “주님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빕니다. 그는 여러 번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내가 쇠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로마에 와서는 더욱 열심으로 나를 찾아 만나 주었습니다.”

부겔로와 호모게네는 바울의 잡힘과 갇힘, 그리고 사형 선고의 소식, 더 나아가 기독교인들을 더욱 강경하게 핍박하고 잡아들인다는 소식을 듣고 신앙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으로 바울을 버렸습니다. 신앙을 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와 반대의 모습을 보인 성도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오네시보로였습니다. 그가 어떠한 출신,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해 성경은 더 이상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놀랍게도 오네보로가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사형선고를 받고 묶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끄러워지 않고, 아닌 두려워하지 않고 로마 감옥까지 찾아와 바울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한번 얼굴 보고 간 것이 아니라 로마에 와서 더욱 열심히 찾아 만나 주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기간 동안 꾸준히 여러번 바울이 갇힌 감옥으로 찾아가 만났다는 것입니다.

뭐 그럴 수 있겠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에베소에서 로마까지의 거리가 약 2,000km입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가 300km 니까 약 7배 먼 거리까지, 샌프란스코에서 2000km 이면 텍사스 달라스까지 그 당시 걸어서 배를 타고 몇 주를 걸려 찾아간 것입니다. 웬만해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로마에 놀러, 관광하러 간 것이 아니라 로마감옥에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사형 선고를 받은 바울을 찾아 간 것입니다. 잘못하면 자신도 기독교인임이 드러나 잡히고 죽을 수 있는 상황이 될 수 있는 위험한 만남과 찾아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보로는 그것을 개의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사역을 그렇게 수고하고 애썼던 바울이 로마 깊은 감옥에 사형수로서 매여 있다는 것을 마음 아파하며 안타깝게 여긴 것입니다.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기도하며 마음 쓰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먼 길, 바울이 갇혀 있는 로마까지 많은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고, 더 나아가 자신에게 위험이 될 수 있는 만남을 위해 찾아 간 것입니다.

오네시보로가 자신을 찾아 온 것을 바울은 기뻐하고 감동했던 것입니다. 오네시보로가 자신을 찾아와 준 것이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오네시보로를 위해 하나님께 자비를 내려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버리고 복음의 신앙을 버린 사람들과 달리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고난 당하는 바울의 편이 되어서 바울을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네시보로라는 이름의 뜻이 “유익을 가져 오는 자”입니다. 그의 이름 그대로 오네시보로는 바울에게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성도들에게, 복음의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힘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찾아간 오네시보로의 신앙과 마음이 도전이 됩니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에베소 교회에 오네시보로와 같은 성도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겠습니까? 복음을 받아 구원을 받은 성도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의 의미대로 “복음에 유익이 되는 자”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에게 힘이 되고 용기가 되어 주는 자가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소원하며 행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지난 주 부장회의에서 우리 교회가 선교를 어떻게 할까를 나누는 대화 가운데 우리 교회에서 후원하고 있는 선교사님들을 찾아가서 함께 만나고 기도해 주고 시간을 보내 주는 것만으로도 크게 힘을 줄 수 있는 사역이 아니겠냐는 대화를 나누었는데 오늘 본문의 말씀인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찾아간 내용과 겹치며 그러한 사역을 저와 우리 성도님들, 교회가 해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복음을 받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복음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위해서 힘이 되고 격려가 되는 축복의 도구와 통로가 되어야 함을 잊지 말고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전하는 일에 동참되어 감당하는 오네시보르의 신앙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Category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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