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17:16-22

16 바울은 아테네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였다.
17 그래서 바울은 회당에서는 유대 사람들과 이방 사람 예배자들과 더불어 토론을 벌였고, 또한 광장에서는 만나는 사람들과 날마다 토론하였다.
18 그리고 몇몇 에피쿠로스 철학자와 스토아 철학자도 바울과 논쟁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몇몇 사람은 “이 말쟁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하고 말하는가 하면, 또 몇몇 사람은 “그는 외국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다”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바울이 예수를 전하고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었다.
19 그들은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당신이 말하는 이 새로운 교훈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소?
20 당신은 우리 귀에 생소한 것을 소개하고 있는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소” 하고 말하였다.
21 모든 아테네 사람과 거기에 살고 있는 외국 사람들은, 무엇이나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법정 가운데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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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바울이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에서, 그리고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한 후에 에덴, 즉 지금의 그리스 아테네에 와서 복음을 전할 때의 일어난 사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아테네 도시에 와서 본 후에 격분 즉 분노했습니다. 16절입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였다”

우리가 살다보면 화를 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사람은 어떤 일에 전혀 화를 내지 않지만 어떤 사람은 같은 일을 보고 화를 내고 분노합니다. 즉 화가 나는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차를 운전할 때 앞에 차가 끼어 들거나 앞에 차가 천천히 가면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그러할 때 양보하거나 천천히 가는 것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치나 정당, 국회의원의 비리에 대해 화를 내고 분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 관심 갖지 않고 그러려니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내가 관심이 있는 부분이 내 원함과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분노합니다. 혹은 누군가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나에 대해 험담이나 비방할 때 분노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사도 바울은 왜 격분했습니까? 무엇 때문에 화가 났습니까? 바울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고 또한 모든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를 구원하신 구원자임을 분명히 알고 그 복음을 전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아테네에 왔더니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수많은 우상들을 섬기는 것을 보고 분노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분노는 사람을 향한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내는 분노는 대부분 사람에게 향한 분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네가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어?”“어떻게 당신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어?” 라고 말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분노는 사람을 향한 분노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분이시오 죄에서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데 아테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수많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우상을 믿고 숭배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에서 화가 난 것입니다.

이러한 분노를 거룩한 분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을 보면서 답답함과 안타까움으로 나타난 격노함.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행동과 삶, 타락함과 죄악의 모습을 볼 때 나타나는 분노입니다. 예수님께서 격노하셨던 분노를 기억하십니까? 예루살렘 성전으로 내려가셨을 때 성전에서 행해서는 안되는 일들이 행하여지는 것을 보셨을 때 분노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며 예배드리는 성전 뜰 안에서 마태복음 21장을 보면 제사에 드릴 동물들을 직접 가져오지 못하게 하고 성전 안에서만 사야 한다는 규율을 만들어 비싸게 팔기에 흥정하고 다투는 소리와, 드려야 할 헌금과 성전세를 유대 화폐로만 받는다고 환전소를 만들어 높은 환율로 돈을 버는 제사장들에게 속한 자들이 가득한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분노하셔서 너희가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성전을 도둑의 소굴,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성전 안에서 동물을 팔고 사는 사람들을 채찍으로 내어 다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을 들어 엎으셨습니다.

성전안에서 사람들이 사고 팔고, 장사하며 예배를 방해하는 모습들을 보고 분노하며 내어 쫓으신 분은 예수님 한분 밖에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도 바울의 마음으로 거룩한 화, 이러한 거룩한 분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 많지 않습니다.

이러한 거룩한 분노는 예수의 심장을 소유할 때 거룩한 화를 낼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에 화를 내느냐를 보면 내가 어떤 심장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돈의 심장을 가진 사람은 돈이 없으면, 돈이 잘 벌리지 않으면, 돈에 손해를 보면 화를 냅니다. 명예의 심장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자존심의 심장을 가진 사람은 누가 자기 자존심을 건드리면 화를 냅니다. 자기 편안함의 심장을 가진 사람은 자기 편안함과 자기 권리를 누군가 건드리면 화를 냅니다.

그러나 예수의 심장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부귀와 명예, 편안함이나 손해,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의 말과 행동으로 인한 분노가 아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높임을 받아야 할 곳과 때에 영광이 가리워져 있고 걸림돌이 되는 것을 볼 때 분노합니다.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고 자기 감정대로, 자기 편한대로,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분노하는 것입니다. 미움으로 인한 분노가 아닌 답답함과 안타까움으로 오는 분노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분노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예수의 심장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수많은 우상들을 섬기는 모습이 분노했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참된 하나님, 구원의 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고 애를 씁니다. 17-18절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회당에서는 유대 사람들과 이방 사람 예배자들과 더불어 토론을 벌였고, 또한 광장에서는 만나는 사람들과 날마다 토론하였다. 그리고 몇몇 에피쿠로스 철학자와 스토아 철학자도 바울과 논쟁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몇몇 사람은 “이 말쟁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하고 말하는가 하면, 또 몇몇 사람은 “그는 외국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다”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바울이 예수를 전하고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었다”바울은 힘을 다해 아테네에 있는 유대인들, 그리고 광장에 나가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 여러 철학자들과 토론하고 논쟁하며 복음을 전하려고 애를 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 속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예수의 심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분노하지만 온유한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22절 “바울이 아레오바고 법정 가운데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 바울은 분명 아테네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수많은 우상들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상을 섬기는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서 “이 잘못된 신을 믿는 자들아” 라고 호통치지 않았습니다. 정죄하고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 라고 부드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볼 때 분노하고 화가 났지만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분노와 화난 그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합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의 선교는 다른 종교와의 싸움이 목적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를 없애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복음을 이해시키고 믿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믿는 자들이 마음이 뜨거워 분노함으로 복음을 막는 일들을 하는 모습을 봅니다. 중세시대 십자군 전쟁을 보십시오. 빼앗긴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고 이슬람 종교를 없애겠다, 수십년간 피의 전쟁을 했습니다. 영혼들을 구원했습니까? 아닙니다. 기독교에 대해 강한 반발만 갖게 했습니다. 지금도 한국에서 그러한 모습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하는 기사들을 종종 봅니다.

단군 동상의 머리를 짜르고, 절에 몰래가서 불상을 파괴하는 일을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절에 가서 크게 이 절을 무너트리고 이 자리에 교회가 세워지게 하소서 성도들과 함께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이 뉴스를 타게 되어서 불교계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몰지각 한 광신도들을 만드는 것처럼 인식하게 하는 일들을 벌입니다.

복음 전파는 종교 전쟁이 아닙니다.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 때문에 한 영혼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한 영혼을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단을 종교 전쟁으로 몰고 갑니다. 서로 싸우게 하고 종교를 논쟁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 구원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 하나님 아닌 우상과 엉뚱한 것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가 거룩한 분노가 있어야 합니다. 안타까운 마음과 답답한 마음, 불쌍한 거룩한 분노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온유함과 친절함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종교가 아닌 한 영혼을 사랑함으로 복음의 사역을 감당해야 한 영혼이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에 에피쿠로스파 종교자들 즉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자들과 스토아 학파, 금욕주의를 강조하며 범신론을 주장하는 자들과 종교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천하 만물을 지으시고 구원의 자리로 이끄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전파하기 위해 온유함으로, 예의를 갖추고 친절함으로 복음을 설명하고 보여 주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해 우리가 나아갈 때 이러한 온유함과 친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17:30 “하나님께서는 무지했던 시대에는 눈감아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회개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종교를 바꿔라가 아니라 회개하라, 예수께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이 가져야 할 모습들입니다. 이 시대에 예수님의 심장 가지고 거룩한 분노를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심장 가지고 사단을 골치 아프게 만드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심장 가지고 편안함이 아니라 평강을 추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때 온유함과 친절함, 그리고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ategory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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