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25:6-12

6 베스도는 예루살렘에서 여드레인가 열흘인가를 지낸 뒤에,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석에 앉아서, 바울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다.
7 바울이 나타나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 사람들이 그를 에워싸고, 여러 가지 무거운 죄목을 걸어서 고발하였으나, 증거를 대지 못하였다.
8 바울은 “나는 유대 사람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황제에 대하여 아무 죄도 지은 일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여 자신을 변호하였다.
9 그러나 베스도는 유대 사람의 환심을 사고자 하여, 바울에게 묻기를 “그대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재판을 받고 싶지 않소?” 하였다.
10 바울이 대답하였다. “나는 지금 황제의 법정에 서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각하께서도 잘 아시는 대로, 나는 유대 사람에게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11 만일 내가 나쁜 짓을 저질러서, 사형을 받을 만한 무슨 일을 하였으면, 죽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나를 고발하는 이 사람들의 고발 내용에 아무런 근거가 없으면, 어느 누구도 나를 그들에게 넘겨줄 수 없습니다. 나는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12 그 때에 베스도가 배심원들과 협의하고 “그대가 황제에게 상소하였으니, 황제에게로 갈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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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4장과 25장에서 바울이 3차 선교를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에 유대인들에게 잡혀서 매를 맞아 죽을 뻔 한 소동 가운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보호하시는 손길 가운데 천부장에 의해 구조를 받고 산헤드린 유대 공회에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 재판을 주도하는 대제사장과 공회 의원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일에 대한 죄악과 자신들의 자리와 권력, 이익, 그리고 자신들의 붙들고 있는 잘못된 구원관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이기 위해 애를 씁니다.

유대 총독이었던 베릭스 역시 바울이 처벌 받거나 감금될 일, 더 나아가 유대인들이 처형해 달라는 어떠한 범죄함이 없음을 유대인들의 고소와 바울의 변호를 통하여 알았음에도 뇌물을 받기 위해서 2년이나 감금해 두었습니다. 베릭스 후임으로 온 베스도 총독 역시 재판을 통하여 바울의 무죄를 알았지만 자신의 입지를 위해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려고 하고 감금해 놓는 모습을 보였음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삶은 자기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 욕심을 위한 전형적인 죄성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나를 위한 삶이 아닌 예수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로만 아니라 내가 진정 주님을 위해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을 위해서, 예수를 위해 살아가는 삶을 사는 모습이 어떠한지 바울의 모습을 통해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첫째, 고난 가운데서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위해 사는 사람은 기다릴 줄 압니다. 바울이 2년을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런 죄 없이 감옥에 2년간 갇혀 있습니다. 억울하고 원통하고 답답하지 않았겠습니까? 벨릭스 총독이 밉고 원망스럽지 않았겠습니까? 바울과 같이 다혈질의 사람이 감옥에 꼼짝없이 2년을 묶여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마음이 탔겠습니까?

그러는 동안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4:27절을 보면 “두해가 지난 뒤에 보로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후임으로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벨릭스는 유대 사람의 환심을 사고자 하여 바울을 가두어 둔채로 내버려 두었다”그리고 25:1절로 넘어가 베스도 총독이 부임할 때까지 성경은 바울에 대해, 또는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어떤 말도 하셨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울아 너 2년만 기다려라. 그러면 된다” 이런 말을 미리 하셨으면 기다리는 것이 쉽습니다. 그런데 2년이 될지 20년이 될지 모르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힘든 이유 역시도 하나님께서 내가 이해 할 수 있도록 답해 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런 대답이 없으면 답답합니다. 사람도 그렇지 않습니까? “누구야? 부르는데 대답하지 않고 뭐라고 물었는데 대꾸가 없으면 얼마나 화가 납니까?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분명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제가 이 감옥에 있어야 합니까?”그런데 하나님께서 2년간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인간적으로 답답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변함없이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권을 믿고 하나님의 때를 묵묵히 기다린 것입니다.

진정 믿는 사람이 기다릴 줄 압니다. 믿지 못하면 기다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기다릴 줄 압니다. 시편 27:14 “너는 주님을 기다려라.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기다려라” 라고 명령합니다. Wait for the Lord”기다림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그래서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을 진정 믿고 의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귀한 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17살에 이집트에 팔려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꿈을 주시면서 “네가 이집트에 노예로 고생하겠지만 10년만 고생하면 총리가 될꺼다” 라고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요셉은 하나님을 믿는 자였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억울한 일, 고통스러운 자리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믿었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 고난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노예로 살면서, 감옥에 갇혀 지내면서. 하나님은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지금 아무것도 안들리는 것 같지만 기다리십시오. 예수님을 위해 살아간다면 기다리십시오. 그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나를 위한 삶은 기다릴 수 없지만 예수를 위한 삶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예수를 위해 사는 사람은 둘째, 환경에 의해 영향 받지 않은 비전의 사람입니다. 25:11 “만일 내가 나쁜 짓을 저질러서 사형을 받을 만한 무슨 일을 하였으면 죽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나를 고발하는 이 사람들의 고발 내용에 아무런 근거가 없으면 어느 누구도 나를 그들에게 넘겨줄 수 없습니다. 나는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베스도 총독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서 재판을 받겠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나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로마로 가겠다고 대답합니다.

바울, 2년간 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재판을 받으며 하는 말이 로마로 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왜 로마로 가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로마 황제에게 공정한 재판을 받기를 원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3장에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붙잡혔던 밤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바울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3:11 “그날 밤에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비전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분명히 “너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비전입니다. 비전은 나의 야망과 소망과 다릅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야망을 하나님이 주신 비전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목회자들 가운데 “우리 교회가 수천명이 되는 것이 비전이다” 라고 말하는데 그런 큰 교회를 해 보고 싶은 야망일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이렇게 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비전이 아니라 야망입니다.

야망을 가진 사람들은 변합니다. 그러나 비전을 받은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하는 사람은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하는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어릴 때 꿈과 야망을 갖습니다. 어릴 때 대통령이 되겠다, 장관이 되겠다고 하다가 조금 크면 돈 많이 버는 사장이 되겠다고 하다가 대학 들어가면 졸업한 후에 Job이라고 있으면 좋겠다고 변합니다.

나를 위한 꿈과 야망은 현실과 상황에 따라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상황과 현실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고 지금도 죄인으로 서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잊지 않고 복음을 들고 로마로 가겠다고 비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수로 가는 것도 괜챦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이루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비전을 받은 사람은 비전을 타협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위한 삶은 타협이 없습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현실과 타협합니다. “지금 상황이 안되쟎아요, 그때는 젊었쟎아요, 지금은 상황이 다르쟎아요, 지금은 이것 때문에, 저것 때문에 안되요” 라고 말합니다.
내 상황이 바뀌었다고 내가 바뀌면 비전의 사람이 아닙니다. 비전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꿈꾸는 여러분, 내 상황이 내가 원하는 상황이 아닐지라도 계속 해서 나가는 것이 바로 비전입니다. 타협하지 마십시오. 예수를 위한 삶이라면 변하지 마십시오. 그 비전을 위해서 뛰어 가기를 원합니다.

이 땅에서 벨릭스와 베스도로 사느냐? 바울로 사느냐를 우리가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의 환심을 사는 삶을 살 것이냐?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삶을 살 것이냐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변함없는 열정과 섬김으로 살 것이냐 아니면 내 상황에 맞추어 변덕스러운 삶을 살 것이냐를 선택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헤이워드 성도님들이 이 시대의 바울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만이 내 삶에, 내 심장에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진정으로 살아가는,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찬양이 진정 삶 가운데 행동으로 나타나는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ategory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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