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베드로전서 5:8-9
8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9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맞서 싸우십시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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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가 많이 듣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바로 위기라는 말입니다. TV 나 news를 통해 우리로 위축하게 하고 걱정하게 하는 말이 바로 ‘위기’라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올라가는 개스를 인해 유가 위기, 계속되는 테러의 위기, 지구의 온도가 계속 올라가면서 온난화로 인해 큰 자연재해가 계속되는 생태계의 위기, 인구 팽창의 위기, 정치적인 위기, 전쟁의 위기, 경제적 위기. 수많은 질병과 암으로 인한 건강의 위기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가장 큰 위기는 다른 위기가 아니라 바로 영적 위기입니다. 우리가 다른 위기에 대해서는 긴장하고 그 위기에 대비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가장 중요하고,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할 영적인 위기에 대해서는 민감하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준비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육체만이 아닌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동물과 같이 육체만 소유하여 본능적으로 살다가 죽어 없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육체를 가지고 짧게 80-90년 살지만 우리의 영은 죽음 후에 새로운 몸을 입고 영원히 살아가는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육체의 고통이나 육신의 편함, 육신의 건강이나 질병, 세상의 전쟁이나 평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강건함, 영혼의 평강함, 영혼의 회복과 생명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영적인 지식이 없기에 짧은 땅에서 먹고 사는 일에, 이 땅에서 육신의 편안함과 건강의 위기만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며 더 나아가 영적 죽음으로 몰아가는 죄의 유혹과 죄의 물듬, 사단의 영적 공격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믿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이기에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경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8절의 말씀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악한 마귀들이 우리를 영적으로 무너트리고 우리의 영혼을 죽이기 위해서 삼킬자를 찾는 우는 사자처럼 우리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사자나 호랑이, 늑대 같은 무서운 동물이 내 주변에 있다면 얼마나 경계하고 조심하겠습니까?
악한 마귀는 에 삼킨바 되면 우리가 소망하고 추구해야 할 영원한 천국과 하늘의 상이 아닌 세상에 있는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에 마음과 관심을 빼앗기게 합니다. 영적인 삶보다는 세상적으로 바쁘게 하고 세상에 관심을 가지게 함으로 영적으로 죽게 하고 나태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무관심하도록 합니다. 더 나아가 관계 속에서도 우리의 마음속에 불신의 마음을 주고 미워하는 마음, 분노하게 하는 마음을 심어 줌으로 서로 사랑해야 하는 관계가 불신의 관계, 미움의 관계, 다투고 싸우는 관계로 남게 합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죄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 평강, 사랑, 축복의 삶, 능력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삼키기 위해서, 유혹하기 위해서 달려드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들은 늘 이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다. 사탄의 공격이 언제 오는지를 알아야 우리가 영적으로 승리할 수 있고 영적으로 승리해야만 우리가 이 땅에서 바른 크리스챤의 삶,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습니다.
사단은 언제 우리를 공격합니까? 첫째, 우리의 신앙이 나태해졌을 때 여지없이 공격합니다. 우리의 신앙상태가 나태해 지면 마귀의 표적 대상이 되어 영적 위기를 당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사자 같은 육식동물들이 노루나 사슴들을 사냥하는 모습들이 나옵니다. 수많은 노루와 영양 같은 무리를 사냥할 때 나름대로 사냥하는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표적을 정한다는 것입니다. 사자가 사냥을 할 때 수십 마리를 향해 달려가지 않고 한 마리 표적을 정하고 그 한 마리를 향해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 목표는 무리 중에서 가장 약해 보이는 놈을 표적으로 정한다고 합니다. 작은 것, 약해 보이는 것, 나태해 보이는 것이 사냥감의 표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귀도 마찬가지 입니다. 신앙생활에 확실하고 열심을 가진 사람들을 표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꾸준히 영적인 삶에 힘쓰는 기도와 말씀과 순종하는데 힘쓰는 자들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관망만 합니다. 그러다가 기도 생활과 말씀 생활이 나태해지기 시작하면 그 틈을 타서 공격하고 그 나태함이 계속 이어지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때 베드로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58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것도 수제자였습니다. 항상 앞장섰던 제자였고 가장 예수님 곁에서 따르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니까 예수님의 뒤를 멀찍이 따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사탄에게 농락당하는 이유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멀찍이 따르고 있을 때 계집종에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말을 세 번이나 말하고,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는 죄와 실수를 결국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가 나에게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으면, 기도함 속에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 어떤 사단의 유혹과 공격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접붙임을 받는 가지입니다. 나무에 꼭 접붙임을 받는 가지는 나무에서 오는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받아서 그 나무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글에서 보니까 나무에 접을 붙일 때 접붙임 된 가지가 1 밀리미터 정도의 작은 틈이 벌어지면 수분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얼마 되지 않아 가지가 마르고 결국 잘려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1mm의 작은 틈새가 벌어지고 나타해 지면, 영적으로 틈이 벌어지면 바로 사탄의 표적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서 말씀을 강론할 때 3층에서 떨어져 죽은 청년이 있습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유두고였습니다. 그 청년이 왜 떨어졌습니까? 졸다가 떨어졌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면, 영적으로 졸고 있으면 우리의 영적은 상태는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근신하라 깨어라”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나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영적으로 깨어 있기 위해서 힘쓰고 있는가? 나태해지고 있지 않은가? 사단이 우리를 공격할 때는 첫째 우리의 신앙이 나태해져 있을 때입니다.
두 번째 사단이 우리를 공격할 때는 우리가 교만하고 스스로 과신할 때 입니다. 우리가 나는 이정도면 되었다. 내가 집사인데, 내가 신앙생활 이정도인데 나는 더 이상 배울게 없다, 다 안다 라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 넘어집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세워주시지만 교만하고 과신하는 자를 외면하신 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단도 그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사단은 교만한 자를 흔듭니다. 공격합니다. 교만하고 스스로 과신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잘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내가, 내가” 입니다. 내가 누군데, 내가 과거에 어떠한 일을 했는데, 내가 얼마나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 내가 어떤 직분을 받았는데. So what?
우리가 사는 것이 누구의 은혜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내가 건강한 몸으로 교회에 나왔지만 하나님께서 한번 건드시면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이 우리 인생 아니십니까? 사울 왕이 왕이 된 것 누구의 은혜였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주시는 것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겸손했던 사울왕이 내 힘으로 승리한 줄 알고 자기가 잘 난줄 알고 아말렉과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오면서 자기 이름을 내세우기 위하여 승전 돌비를 세웁니다.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기의 생각에 더 좋은 대로 행동합니다. 결국 어떠한 결과를 맞이합니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가 교만해 지기 시작했을 때 그 안에 악령이 들어가 그의 삶을 조종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무너트린 후에 자신만만해졌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아이성이 작다고 3천명의 군대만 풀었습니다. 결과가 어땠습니까? 참패를 당했습니다.
사단은 교만한 사람을 공격합니다. 교만한 사람이란 “나”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정도면 되었다고 안주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우선이 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어야 하고 나를 인정해 주어야 하고 내 힘으로 내 뜻으로 내 생각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모든 일을 결정할 때, 어떠한 말을 할 때 , 어떠한 행동을 할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기도하며 묻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는 자입니다. 뭔가 되는 것 같을 때일수록 조심 하십시요. 남보다 조금 앞선다고 우쭐하지 마십시오.
세 번째, 사단이 공격할 때는 비난과 원망, 불평할 때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감사와 찬양과 순종의 삶을 살때는 사단이 공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우리의 생각에 환경과 사람을 비난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기 시작할 때 사단이 그 틈새로 들어옵니다. 내가 사단에 시험에 넘어갔다, 시험에 들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기준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 마음에, 내 입에서 비난과 원망 불평이 나오면 그것은 이미 시험에 들었다는 증거입니다. 마귀의 덫에 걸린 조짐입니다. 마귀는 비난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틈이 보이면 여지없이 공격해서 생각과 삶을 완전히 흔들어 놓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이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평, 원망, 비난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를 비난하고, 물이 없는 것을 불평하고, 만나만 먹는다고 원망하고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후에 불가능하다고 비난하고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0:10절을 통해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주십니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문제와 어려움과 환난을 겪습니다. 어떠한 사람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원하던 계획이 무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원망과 비난과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잘못된 일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 일을 선하게 이루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우리가 불평과 비난과 원망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입을 지켜야 합니다. 모든 일 가운데 역사하시고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원망한다고 비난한다고 불평한다고 그 상황이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상황은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스타일을 바꾸십시요. 불평하고 비판하고 원망하던 것들을 감사로 바꾸십시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기대하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십시요. 감사 앞에 찬양 앞에 마귀는 도망할 것입니다. 어려움과 환난이 있을때 나 자신을 돌아보며 고쳐야 할 것을 고치는 지혜와 감사와 찬양의 삶으로 마귀가 틈타지 못하도록 힘쓰시는 헤이워드 가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