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사기 6:33-40
33 그 때에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사막 부족이 모두 함께 모여 요단 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평지에 진을 쳤다.
34 주님의 영이 기드온을 사로잡으니, 기드온은 나팔을 불어 아비에셀 족을 모아 자기를 따르게 하고,
35 전령들을 온 므낫세 지파에 보내어 그들도 자기를 따르게 하였으며, 아셀 지파와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에도 전령들을 보내니, 그들도 그와 합세하려고 올라왔다.
36 기드온이 하나님께 아뢰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나를 시켜서 이스라엘을 구하시려고 하십니까?
37 그러시다면,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놓아 두겠습니다. 이슬이 이 양털뭉치에만 내리고 다른 땅은 모두 말라 있으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를 시켜서 이스라엘을 구하시려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38 그러자 정말 그렇게 되었다. 기드온이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양털뭉치를 쥐어짜 보니 양털뭉치에 내린 이슬이 쏟아져 그릇에 물이 가득 찼다.
39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었다. “주님, 저에게 노하지 마십시오. 제가 한 번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양털뭉치로 한 번만 더 시험하여 보게 하여 주십시오. 이번에는 양털은 마르고, 사방의 모든 땅에는 이슬이 내리게 하여 주십시오.”
40 그 날 밤에 하나님은 그대로 하여 주셨다. 양털은 말라 있었고, 사방의 모든 땅만 이슬로 젖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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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사 기드온에 대해서 들어본 성도라면 다 아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기 위한 기드온이 했던 양털뭉치 사건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이라면 누구라도 “내가 만약 하나님께서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시고 양털뭉치 같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보여 주시면 내가 어떤 일이라도 할 것이다” 라는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확신하고 순종하기 원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에 대한 갈등들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뜻 같기도 하고 저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뜻 같기도 하고 헷갈립니다. 어제는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뜻인 것처럼 느껴졌는데 오늘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뜻처럼 느껴집니다.
오늘 기드온의 양털뭉치 사건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원리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하신 것처럼 기적과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시기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꿈속에서 주님이 나타나셔서 “OO 야 이렇게 해라” 라든지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여 주시든지, 혹은 특별한 영적인 사람, 부흥강사님이나 기도원 원장님이 기도하는 중에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라는 식으로 특별한 사인을 받기를 원합니다.
기드온과 같이 꿈을 통해, 누군가를 통해,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환상을 통해 말씀하시면 분명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확실하면 불속이라도 뛰어 들겠다 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본문에 나온 양털뭉치의 사건을 보면서 기드온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본문에 나온 기드온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했던 양털뭉치 행동이 우리가 본받을 만한 일이냐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확인하기 위해서 기드온에게 했던 그런 방식으로 말씀해 주시고 우리가 그러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를 원하시냐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기드온이 하나님께 양털뭉치가 젖고 마르고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기드온은 하나님의 뜻을 이미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하나님께서는 이미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알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이미 주님의 천사를 통하여 주님께서 기드온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사기 6:14 “주님께서 그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라. 내가 친히 너를 보낸다” 그 말을 기드온이 믿지 못하자 바위에서 불이 나와 기드온이 준비해 온 빵과 고기를 태우는 것을 기드온이 이미 보았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지목하여 큰 용사라 부르시고, 너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시고 너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고 한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드온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보여 주시기 위해서 기드온에게 또한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34절 “주님이 영이 기드온을 사로잡으니” 기드온에게 성령이 임하자 기드온이 보낸 전령을 받고 32,000명이 기드온에게 모여 들었습니다. 무명이었던, 겁쟁이었던 기드온이 전쟁을 위해서 모이라고 전갈을 보냈을 때 32,000명이 기드온 아래 모였다는 것이 기적 아닙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고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택하셨다는 분명한 증거가 아닙니까?
그런데 기드온이 하나님께 다시 자신이 사사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는지에 대한 확증을 또 다시 양털로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양털확증 요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옳았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믿음 없음을 긍휼히 여기셔서 기드온의 요구대로 하루는 양털뭉치에만 이슬이 내리게 하셨고 또 요구하자 그 다음 날에는 양털뭉치만 빼고 마당에 이슬을 내리게 하셨지만 기드온의 양털 사건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 좋은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사건이 아니라 기드온의 믿음이 부족함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본문의 사건을 자세히 보면 양털뭉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려고 했던 기드온은 그것으로 인해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첫날 기드온이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37절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놓아 두겠습니다. 이슬이 이 양털뭉치에만 내리고 다른 땅은 모두 말라 있으면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저를 시켜서 이스라엘을 구하시려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렇게 사인을 보여 주시면, 기적을 보여 주시면, 뭔가를 보여 주시면 내가 확신하겠습니다” 라고 기드온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38절을 보면 그대로 하나님께서 해 주십니다. “그러자 정말 그렇게 되었다. 기드온이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양털뭉치를 쥐어짜 보니 양털뭉치에 내린 이슬이 쏟아져 그릇에 물이 가득찼다”
기드온이 자신이 요구한 표징을 보고 “주님 이제 제가 확신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나요? 아닙니다. 자신이 제시한 사인에 답하신 모습을 보고도 여전히 갈등합니다. 그래서 또 다른 표징을 구합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보여 주십시오” 40절을 보면 “그 날 밤에 하나님은 그대로 하여 주셨다. 양털은 말라 있었고 사방의 모든 땅만 이슬로 젖어 있었던 것이다” 기드온은 그 표징을 보고도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 표징을 보고 기드온이 확신하고 믿었다면 분명 41절에 “기드온이 그 표징을 보고 드디어 확신하고 믿었더라”라고 쓰였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이 없습니다. 저는 생각하기에 여전히 기드온은 갈등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꿈에 나타나 한마디만 해주시면 주님의 뜻 인줄 믿겠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런 꿈을 꾸면 이게 정말 하나님이 주신 꿈인지 헷갈립니다. 어떤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시지도 않은 꿈을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고 착각하고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일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본질적인 뜻과 지엽적인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하고, 꼭 그렇게 해야 하고, 상황과 형편에 따라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뜻이 있고 우리가 자유스럽게, 넓게 선택할 수 있는 비본질적인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꼭 붙잡아야 하고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바로 본질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원하시는 뜻이 무엇이고, 내가 꼭 해야 한다고 명하신 그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알고 붙잡고 확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꼭 알아야 하고 확신해야 하고 붙들어야 할 본질적인 하나님의 뜻을 성경에 분명하고 확실하고 명확하게 이미 다 말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분명하고 명확하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항상 기뻐하는 것,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본질적인 뜻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성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음행을 멀리하여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뜻은 우리들이 너무나 많이 듣고,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들입니다. 나에게 죄를 지은 자들을 일곱 번에 일흔번씩 용서하는 것, 끝까지 인내하고 충성하는 신실된 삶을 사는 것,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 험담하지 않고 덕이 되는 말을 하며 살아가는 것,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내 것을 희생하고 하나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본질적인 뜻입니다. 양털뭉치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아도 이미 성경에 너무나 분명하고 쉽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셨습니다.
물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비본질적인, 지엽적인 뜻도 있습니다. 어떤 집을 살 것인지, 어떤 차를 살 것인지, 어떤 직장을 선택할 것인지.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본질적인 것은 되지 않습니다. 비본질적인 것들도 우리가 지혜롭게 선택해야 하지만 비본질적인 것들은 무엇을 결정해도 본질적인 것에 비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운명론적이지 않습니다. 꼭 그 사람을 만나야 하고, 꼭 그 집에서 살아야 하고, 꼭 그 직장을 다녀야 하고.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운명이 아니라 우리의 성품과 우리의 인격에 더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뜻보다 비본질적인 문제에 매달려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고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비본질적인 문제, 운명적인 뜻이 아닌 우리의 성품, 우리의 인격,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느냐에 더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관심이 있지 않으시고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관심이 계십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하느냐에 관심이 있지 않으시고 어떠한 사람으로 일을 하느냐에 관심을 두신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예를 들면, 하나님의 뜻은 내가 어떤 배우자를 만나고 누가 내 배우자 되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배우자로 그 사람을 섬기고 사랑할거냐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 어떤 직장을 선택할 것이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며 얼마나 성실하고 충성되이 직장생활을 할 것이냐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본질적인 뜻이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주신 사람이냐 아니냐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을 내가 얼마나 품고 사랑하고 인내하고 세워줄 것이냐가 하나님의 본질적인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뜻보다는 비본질적인 뜻에 더 관심이 있고 비본질적인 뜻을 알기를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본질적인 것보다 비 본질적인 것이 인간적으로 볼 때 내게 유익과 편함과 내 원함과 직접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지하게 우리 마음의 깊은 바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들으려는 진정한 마음의 동기가 무엇인가? 내가 진정 나의 의와 나의 이익과 편함이 아닌 이미 우리에게 분면하고 확실하게 알려 주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알고 믿음으로 순종하고 나가면 우리의 지엽적이고 비본질적인 것들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실 것입니다. 갈등하지 않고, 우왕좌왕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흔들거리지 않고 담대함과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그러한 삶을 추구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