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여호수아 20:5-9
5 죽은 사람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사람이 뒤쫓아온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손에 살인자를 넘겨 주어서는 안 된다. 그가 전부터 그의 이웃을 미워한 것이 아니고 실수로 그를 죽였기 때문이다.
6 그 살인자는 그 성읍에 머물러 살다가,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은 다음, 그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은 뒤에야 자기의 성읍 곧 자기가 도망 나왔던 성읍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7 그래서 그들은 요단 강 서쪽 지역에서는 납달리 산간지방에 있는 갈릴리의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간지방의 세겜과 유다 산간지방의 기럇아르바 곧 헤브론을 도피성으로 구별하여 지정하였다.
8 또 여리고 동쪽, 요단 강 동쪽 지역에서는 르우벤 지파의 평지 광야에 있는 베셀과 갓 지파의 길르앗 라못과 므낫세 지파의 바산 골란을 도피성으로 구별하여 지정하였다.
9 이 성읍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나 그들 가운데 살고 있는 외국인 가운데서 누구든지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때에, 그 곳으로 피하여 회중 앞에 설 때까지, 죽은 사람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사람의 손에 죽지 않도록 하려고, 구별하여 지정한 도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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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도피성을 지정하라고 하신 이유와 의미는 우리의 한계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실수로 살인한 자를 받아 주고 보호해 주는 곳입니다. 도피성의 영적인 의미는 나의 부족함, 연약함, 죄됨을 깨달아 낮아짐과 고백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도피성을 지정하라고 하신 의미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5절 “죽은 사람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사람이 뒤 쫓아 온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손에 살인자를 넘겨 주어서는 안된다. 그가 전부터 그의 이웃을 미워한 것이 아니고 실수로 그를 죽였기 때문이다” 도피성으로 피하는 사람은 부지중에 사람을 죽였습니다. 죽은 사람의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이 죽은 사람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고 자신을 잡아 죽이려고 자기를 찾으려고 혈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결백하지만 어떻든지 사람을 살인했기에 언제 자기가 복수를 당할지 모르는 불안함 속에 살아야 합니다. 비록 의도하지 않았지만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자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도피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도피성을 찾아 들어 갔을 때 도피성의 장로들이 당신을 우리가 이 성에서 책임지고 보호해 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안도가 되겠습니다. 더 이상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도피성 안에 들어오면 절대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두려움과 걱정 근심 속에 살아갑니까? 정말 두발 뻗고 마음 편하게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늘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지금 당장 만난 막다른 골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힘들어 하고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이 아닙니까?
과연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진정 우리로 하여금 안식을 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도피성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쉴 수 있는 곳, 우리를 지켜 주고 평강을 주는 도피성이 있습니다. 그 도피성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많은 돈이 진정한 안식이 될 수 없습니다. 건강도 진정한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몸이 건강할지 몰라도 마음에 늘 근심 걱정이 있고 지금 건강하다고 해도 언제 암이 발견될지, 언제 건강이 사라질지 모릅니다. 자식도 안식이 될 수 없습니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것들은 잠시 우리에게 평안을 주고 안식을 줄지는 몰라도 변하지 않는 안식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신경 안정제를 사람들이 복용하고 있습니까? 마약도 일종의 신경 안정제가 아닙니까? 유명하다고 하는 인기 배우나 연예인, 정치인들이 그러한 신경 안정제에 의존합니다. 강력한 효과를 원하기에 불법 마약을 사용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표현하지 않지만 마음에 늘 불안과 근심과 걱정으로 살아갑니다. 원망과 불평으로 살아갑니다. 진정한 평강과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참된 만족과 감사를 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시련과 고통속에서도 기뻐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진정한 안식은 바로 예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예수님을 평강의 왕이라고 표현합니다. 요한복음 16장에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움에 떨고 숨어 지내는 제자들을 부활의 몸으로 찾아 오셔서 제자들에게 처음하신 말씀도 “평안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게 너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았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주님께 달려갔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강한 성루 그 곳에 달려 간자 안전하리” 시편 59:16 “내가 재난을 당할 때에 주님은 나의 요새,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에 아침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노래하렵니다”이 고백을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사람을 보내어 그의 집을 감시하고 있을 때 지은 시입니다.
여호수아 20장의 도피성이 바로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안식처이시며 평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살면서 많은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처할 때에 피난처에서 안식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두려움과 근심, 걱정 가운데 있던 자가 도피성으로 달려가 장로들에게 자신의 실수를 고백하면 그 성에서 보호 받고 안전함을 약속 받은 것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에 두려움과 근심, 걱정과 아픔, 낙심과 실망, 좌절감과 열등감,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고, 평강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마음이 있을 때 다른 곳이 아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쏟아 놓아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내 마음을 고백하고, 나의 연약함, 나의 근심, 나의 아픔, 내 힘으로 되지 않는 감정과 상처들, 고민과 어려움을 내어 놓으면 하나님께서 평강을 허락하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너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은혜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할 때 그 복이 나의 복이 됩니다. 기도하는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근심하고 걱정하고 원망하고 좌절하는 자가 아니라 기도하는 자가 되어 그 기도 속에 주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고, 능력으로 이기고 승리하는 자가 되어 “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