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갈라디아서 5:22-23
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23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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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의 여덟 번째의 모습은 온유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모습은 온유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온유라는 단어를 겸손으로 번역된 성경도 많습니다. 사실 온유와 겸손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온유란 어떠한 모습입니까? 온유의 사전적인 의미는 성경이나 태도가 부드러운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에게 온화하고 부드럽고 따스한 태도라고 정의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인 온유는 고분고분하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항상 웃음을 지으며 상대방이 원하는대로 따르는 그러한 모습이 아닙니다. 온유라는 말의 원어인 ‘프라우테스’라는 말의 의미는 힘이 쎄지만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가 통제되는 힘을 의미합니다. 즉 절제된 성품입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인물 가운데 성령의 열매인 온유의 모습과 태도를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을 모세라고 말합니다. 민수기 12:3절을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라고 말합니다. 왜 모세를 향해 온유한 사람이라고 했는가를 민수기 12장의 사건만을 보고 살펴 보면 모세가 구스 여인 즉 이디오피아 여인을 아내로 삼았는데 그런 모세를 그의 형과 누이인 아론과 미리암이 비방했습니다. 민수기 12:1절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데리고 왔는데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가 그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았다고 해서 모세를 비방하였다”
그리고 2절을 보면 “주님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라고 합니다. 분명 모세는 구스 여인을 아내로 삼은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그 말씀에 순종한 것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론과 미리암은 구스 여인, 이디오피아 여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떤 이유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심하게 모세를 비방하고 비난하며 대적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할 때 모세는 그러한 아론과 미리암을 대할 때 인간적으로 분노하거나, 다투거나, 변명하거나, 혹은 내가 지금 하나님께 택함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는 리더인데 감히 대드느냐 라고 위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온유, 겸손 즉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대했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보이기를 원하시는 성령의 열매인 온유란 나에게 잘 하는 사람들, 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따스하고 부드럽고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모습이 아닌 누군가 나를 대적하고, 공격하고, 모질게 대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게 따스하고 부드럽고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온유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본성, 우리의 죄성은 나를 대적하고, 공격하고, 모질게 대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게 따스하고 부드럽고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온유한 태도가 아닌 분노하고, 미워하고, 눈을 흘기고, 업신여기고, 아론과 미리암처럼 비난하고 비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기를 원하시는 온유는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즉 성령님의 충만하심과 감화 감동하심, 성령님의 마음을 가져야 보일 수 있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가장 온유한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마태복음 11: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 라고 하신 것은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예절을 사람들에게 보인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게 되셨을 때 그 예수님을 정죄하고, 거짓 증언을 하고, 자신을 배반하고, 모함하고, 죄가 없음을 알고도 자기 살겠다고 죽음으로 넘겨 주고, 채찍으로 때리고, 침을 뱉고, 십자가를 들고 가게 하고, 그 손과 발에 못을 박아 달고, 그 아래에서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분노하거나, 저주 하거나, 변명하거나,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비판하거나, 원수를 갚겠다고 마음에 칼을 갈지 않으셨습니다.
놀랍게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순순히 잡혀 주셨습니다. 묶임을 받을셨습니다. 빌라도의 법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불법이다 정의가 어디에 있느냐고 소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몸에 내리치는 채찍과 매질을 그대로 받고 감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위에 손과 발이 못에 박혀 달리셨을 때 그 십자가 위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저희가 알지 못하나이다”
온유의 열매, 온유의 모습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때 가능합니다. 온유함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 앞에 전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서 온유함은 갑자기 나타나는 모습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길들여져야지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힘이 있으셨지만 그 힘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내려 놓으시고 제어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모시고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온유함으로 상대를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온유함은 우리를 괴롭게 하고 답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들어 보십시오. 마태복음 11: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온유한자가 마음에 쉼을 얻습니다.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할 때 미워하고, 원망하고, 저주하고 있으면 마음에 평강이 없습니다. 온유함으로 그 영혼을 축복하고, 용납하고, 위해서 기도하는 온유함이 있을 때 마음에 쉼을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성령의 충만함 속에 온유함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쉼과 평강을 누리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가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