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빌립보서 1:18-21
18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거짓된 마음으로 하든지 참된 마음으로 하든지, 어떤 식으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앞으로도 또한 기뻐할 것입니다
19 나는 여러분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내가 풀려나리라는 것을 압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21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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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폭적으로 섬겼습니다.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 방해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식민지 나라의 목수의 아들이었던 예수라는 분이 천하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서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루어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고 그 분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는다는 말에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기 보다는 조롱을 당했고, 유대인들에게는 배척과 죽음의 위험을 당하며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3차 선교 여행을 힘들게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그는 거짓 증언과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2년간 감옥에 갇혀 자신의 결백을 총독들에게 재판을 통해서 밝히고자 했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않아 로마 황제에게 항소하겠다고 함으로 로마로 이송되어 2년이란 시간을 감옥에 갇혀 지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바울이었다면 열심을 다해 하나님의 뜻대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했는데 감옥에 갇혀 지내고 있는, 언제 풀려 날지 모르는 답답한 상황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불평과 원망을 쏟아 놓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18절을 보면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앞으로도 또한 기뻐할 것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기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19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나는 여러분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내가 풀려나리라는 것을 압니다”바울은 비록 감옥에 갇혀 있지만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었기에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기도의 능력과 성령님의 도우심에 대한 확신으로 어느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이 서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입을 벌려 고백하고 선포한 것처럼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이렇게 버리실 분이 아니십니다. 반드시 도우시고, 역사하시고, 승리케 하시고, 풀리게 하시고, 부흥케 하실 것입니다” 라는 믿음의 고백과 선포를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한 믿음으로 선포하며 살았습니다.
다윗도 거인 골리앗 앞에서 사무엘상 17:46절에 “주님께서 너를 나의 손에 넘겨 주실 터이니, 내가 오늘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사람의 주검을 모조리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밥으로 주어서, 온 세상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하겠다”라고 선포합니다.
히브리서 13:6절에도 “우리는 담대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다. 누가 감히 내게 손댈 수 있으랴?” 이런 믿음의 고백이 우리로 하여금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그 어떤 낙심도 절망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자신을 감옥에서 반드시 풀려나게 하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신다. 나를 풀어 주실 것이다” 라는 믿음에서 멈추지 않고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믿음이었습니다. 20-21절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이 고백은 비록 내가 감옥에 풀려나지 않더라도, 아니 사형을 당해 죽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기꺼이 기쁨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들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이 진행되어야만 하나님께서 도우셨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으로 문제가 풀리고, 잘되어야지만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진정 믿는 사람, 즉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진다면 내가 받아 들이고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내 원하는 뜻대로, 인간적으로 잘되는 쪽으로 일이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20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라고 할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라는 말은 ‘낙심하지 아니하고’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즉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를 통하여,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감옥에서 풀려 날 수 있다고 믿지만 비록 감옥에서 풀려나지 못하더라도,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낙심하지 않겠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으면 불구덩이에 던져진다고 협박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구덩이 가운데서도 살리실 것입니다” 라는 믿음을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즉 우리가 죽음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버리지 않겠다는 믿음의 고백이 본문 20절의 바울의 ‘살든지 죽든지’‘부끄러움, 즉 낙심하지 아니하고’라는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들의 믿음과 기도는 “하나님, 저를 반드시 이 감옥에서 풀려서 내 보내 주십시오. 내가 당한 것 반드시 보복해 주시고 제가 옳다는 것 밝혀 주십시오. 이렇게 되야지만 되는 겁니다” 라는 믿음과 기도에 머무르기 쉽습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할 때 눈 앞에 보이는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잘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우리의 삶의 목적이 내가 아닌 주님께 있음을 깨닫기 시작하면 우리의 기도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바울과 같이 감옥에 갇혀 있든 풀려나든, 일이 내가 원하는대로 잘 되든 잘 되지 않든, 사람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살든 죽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받아 들이고 신뢰하며 감당하겠다는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을 진정 알고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정말로 그 상황을 당하면 쉽지 않지만 “비록 내 삶에 아픔과 고통이 머문다고 하여도, 질병과 가난함이 있고, 억울함과 이해되지 않는 문제들이 풀리지 않을지라도 그러함 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겸손히 받아 들이고 감당하겠습니다” 라는 기도가 우리의 신앙과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이러한 믿음과 마음이 있었기에 21절에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라고 고백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는 자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기도 제목이 응답되든지 더디 되든지, 내 건강을 회복하든지 못하든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신뢰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주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