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9:28-30
28 그래서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예루살렘을 자유로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말하였고,
29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과 말을 하고,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꾀하였다.
30 신도들이 이 일을 알고, 사울을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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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절을 보면 “그래서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예루살렘을 자유로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말하였고”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라는 말은 사울의 회심과 복음 전하는 자가 된 것을 믿지 않았던 예루살렘 성에 있는 제자들이 바나바의 중재와 도움으로 사울이 어떻게 다마스쿠스 성을 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지, 어떤 말씀을 들었는지,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로 전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함으로 사울을 믿어 주고 받아 주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이 잘 된 것 같이 보이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가장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이 누구보다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들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가장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왜 사울이 다마스쿠스 성에서 나와 하필이면 예루살렘 성으로 오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지내려고 한 것입니다.
사울의 과거에 대해 조금 살펴보면 사울의 고향은 길리기아 지역의 다소, 지금의 터어키에 있는 해변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다소는 무역의 중심지이고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좋은 다소에서 나름대로 잘 살 수 있는 가진 자였습니다. 하지만 살기 훨씬 좋은 다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유대인이기에 하나님을 바로 섬기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성경과 율법을 제일 잘 가르치는 최고의 유대교 학교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인정받는 자리와 위치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고향 다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 때의 예루살렘은 그러한 사울을 반겨주는 곳이었습니다. 율법을 배우고 따르겠다고 할 때 가말리엘 문하에서 받아 주었고 율법을 철저하게 배운 바리새인이 되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더 나아가 권력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스데반 집사를 잡아 죽이는 일을 할 수 있었고,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 성에까지 가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오는 공문을 받아 갈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예루살렘 성은 사울에게는 편한 곳이었습니다. 인정받는 곳이었습니다. 실세를 누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루살렘은 더 이상 사울에게 호의적인 곳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이 이제 예수를 믿는 자가 되었고 예수를 전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예루살렘은 그를 맞아주고 환영해 주고,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전에는 그의 편이 되어주고, 힘이 되어 주던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고 회심한 사울의 소식을 들었고 그를 잡아 죽이려고 하는 곳이었습니다. 즉 생명의 위협을 받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가장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까이 한 것입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는 것과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지냈다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지냈다는 것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수다 떨거나 밥을 같이 먹으며 세상살이나 정치 이야기를 편하게 이야기 하거나, 함께 골프치고 회포를 나누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함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죄용서함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구원의 길임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행한 일을 28-29절에 “그래서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예루살렘을 자유로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말하였고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과 말을 하고,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할 때 그 말을 듣고 받는 유대인들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29절 후반절 말씀에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꾀하였다” 라고 말합니다.
사울에게 예루살렘 성은 다마스쿠스 성보다 더한 핍박과 거부와 저항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그러할 것이라고 사울은 모르고 들어갔겠습니까? 아닙니다. 분명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그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자신이 누구보다 핍박하던 곳이었는데 이제 자신이 회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선다면 얼마나 큰 핍박이 있을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에게는 빚진 자의 마음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자신이 예루살렘 성에서 예수 믿는 자들에게 엄청난 핍박을 했기에 어느 곳보다 그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당할 핍박과 어려움을 감수하고 들어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진정 예수의 복음을 깨달은 자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받은 은혜와 복음이 크다는 것을 알수록 내가 전해야 할 복음의 크기가 크기에 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여 다들 힘들다고 하는 희생의 자리, 고통의 자리로 들어가는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한 모습을 가장 잘 보이는 분들이 선교사로 헌신하시는 분들이 아니겠습니까? 목회자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단지 특별히 선교사나 목회자들만의 마음이 아닌 예수를 진정 만나고, 나의 죄악을 깨닫고, 그 죄 사함의 은혜를 깨닫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은 자들 모두가 보여야 할 태도이고 모습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 자리가 비록 힘들고 어려운 자리일지라도 사울의 모습은 담대함이었습니다. 다시한번 28절을 보겠습니다. ” 그래서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예루살렘을 자유로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말하였고” 사울은 사도들에게 인정을 받고, 사도들과 함께 생명의 위협이 있는 예루살렘에서도 담대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말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십자가의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하며 전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에서 사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29-30절을 보면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과 말을 하고,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꾀하였다. 신도들이 이 일을 알고, 사울을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냈다” 라고 말합니다. 다마스쿠스에서도 바울의 복음을 듣고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했고 예루살렘에서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듣고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결국 성도들은 사울이 계속 예루살렘에 있으면 죽임을 당할 것을 생각하여 그의 고향 다소로 보내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사울이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 다소로 가게 된 것이 예루살렘 성도들이 보낸 것 같지만 사도행전 22:17-18절을 보면 그때의 상황을 간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뒤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황홀경에 빠져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서둘러서 예루살렘을 떠나라. 예루살렘 사람들이 나에 관한 네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봤자 그 사람들이 듣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있지 말고 떠나라고 하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서 그의 고향인 다소로 가게 된 것입니다.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면 사울이 다시 고향 다소로 오게 된 것은 실패였습니다. 성공을 꿈꾸며 예루살렘으로 갔었는데, 유대교의 지도자가 되어 권위와 명예, 권력을 갖게 되었는데 결국 도망쳐 온 실패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적으로는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지만 가장 귀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믿고, 하나님의 택한 복음의 사도가 된 것은 세상의 어떤 성공과 자리보다 귀한 축복임을 사울은 알았고 저희도 압니다.
그 후에 사울은 자신의 성공과 편함을 위한 곳을 찾아 다니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곳, 복음이 필요한 곳, 인간적으로는 배척이 있고, 핍박이 있고, 거부함이 있는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다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신앙이 되기를 원합니다. 복음을 위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가라고 하신 다소로 가고, 더 나아가 가서 전하라고 하시는 곳으로 달려 나갈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자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