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16:19-23

19 그 여자의 주인들은, 자기들의 돈벌이 희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광장으로 관원들에게로 끌고 갔다.
20 그리고 그들을 치안관들 앞에 세워 놓고서 “이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인데, 우리 도시를 소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21 이 사람들은 로마 시민인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부당한 풍속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2 무리가 그들을 공격하는 데에 합세하였다. 그러자 치안관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그들을 매로 치라고 명령하였다.
23 그래서 이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그들에게 매질을 많이 한 뒤에,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그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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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사건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울이 빌립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과정 속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점을 보는 귀신 들린 여인에게서 귀신을 쫓아냄으로 그 여인의 주인이 신들림이 사라짐으로 점을 보지 못함으로 돈벌이를 못하게 되자 분노하여 바울을 모함하여 바울과 실라가 심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내용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부당한 일을 당한 사건 같아 보이지만 영적인 눈으로 볼 때는 빌립보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사단의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귀신 들린 여인이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자리마다 따라와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인데,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다” 라고 겉으로는 돕는 것 같지만 사실 사단에 사로잡혀 방해하는 사단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바울은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여자에게서 나오라” 라고 선포함으로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사단의 역사와 방해가 있음을 영적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먼저는 나를 공격하는 사단의 공격과 역사가 있음을 분별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함과 기쁨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원망과 불평, 근심과 두려움, 정죄와 비난의 마음이 생길 때 사단의 공격이요 방해임을 깨닫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의심하게 하고, 미루게 하고, 변명하게 하는 생각들이 사단의 공격이요 방해임을 깨닫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더 나아가 내가 사단에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자기 생각에는 예수님을 위한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다고 말씀하실 때 “절대 그러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라고 말렸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도 나름대로 하나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성도를 위하고, 그 일이 맞는 일이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막고 걸림돌이 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더욱 성령의 충만함 속에, 성령에 사로잡힌 삶, 영적인 분별력을 구하는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19-21절을 보면 “그 여자의 주인들은, 자기들의 돈벌이 희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광장으로 관원들에게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들을 치안관들 앞에 세워 놓고서 “이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인데, 우리 도시를 소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로마 시민인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부당한 풍속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자신의 종이었던 귀신 들린 여자가 귀신을 나가자 귀신들려 신통하게 과거를 맞추며 점을 봐 주는 것으로 큰 수익을 얻었는데 더 이상 점을 볼 수 없게 되어 돈 벌이가 끊어지자 분노하여 바울과 실라를 잡아다가 빌립보 성의 관원들과 치안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부당한 풍속을 전하고 있다고 고소를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첫 마디가 “이 사람들은 유대사람들인데 로마 시민인 우리들에게 받아들일 수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부당한 풍속을 전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왜 바울을 향해 “유대 사람인데” 라고 했을까요? 유대 사람들은 이미 수백년전에 나라가 망한 민족이었습니다. 힘이 없는, 저주 받은, 수많은 민족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는 천민처럼 여겨지는 민족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민족의 사람이 로마 시민, 즉 그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강대국이요, 철학과 학문, 군사력에서 최고를 자랑하고 있는 로마 시민들에게 구원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 우습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조차 구원하지 못한 비참한 민족이 최강국 로마 시민들에게 구원과 축복을 전하는 것이 말이 되냐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가난하고 비참한 나라인 이스라엘의 촌 동네 목수였던 한 유대인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데 그 유대인이 천하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 십자가 형에 달려 죽은 자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전하는 것이 로마시민들에게는 얼마나 말도 안되는 말로 들렸겠습니까?

사실 오늘날도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 똑똑한 사람들, 나름대로 배운 사람들은 그 복음이 미련하게 들립니다. 상식에 어긋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고 비웃습니다. 2000년전에 죽은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과 삼일만에 부활해서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말, 그리고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과 천국에 간다는 말을 비웃습니다. 인간적인 상식과 과학, 논리로 볼 때는 말도 되지 않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말이 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겉으로 볼 때 복음은 이해되지 않는 비이상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그 뒷면과 그 속에는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보화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볼 수 있는 비밀이요 감추어진 보화인 것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해서 그 복음의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고, 깨닫지 못하게 하고, 더 나아가 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방해하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비록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은 자신의 돈벌이가 끊어진 것에 분노하여 바울을 고소했지만 결국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고 핍박하는 사단의 수단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바울은 어떻게 됐습니까? 22-24절입니다. “무리가 그들을 공격하는 데에 합세하였다. 그러자 치안관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그들을 매로 치라고 명령하였다. 그래서 이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그들에게 매질을 많이 한 뒤에,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그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간수는 이런 명령을 받고, 그들을 깊은 감방에 가두고서, 그들의 발에 차꼬를 단단히 채웠다”

바울을 유대인이라고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마음을 가진 자들이 그 주인의 말에 합세하여 공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니까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무리에 휩쓸려서는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큰 길로 다 간다고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이 세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고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과 말씀과 명령대로 좁은 길을 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여호수아 1:7절의 “오직 너는 크게 용기를 내어,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지시한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여라” 라는 명령처럼 담대하게 주님께서 가라 하신 길과 명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이 무리들로 인해 제대로 판결도 받지 못한 체 치안관들에 의해 옷을 찢어 벗기움을 당하고 매질을 많이 당한 후, 극악무도한 형벌자 취급으로 깊은 감방에 발에 차꼬에 채워져서 깊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당한 것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이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런 일을 한두 번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1:23-25절에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내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말합니다마는,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 즉 하나님의 뜻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대로 살아가는 삶을 철저하게 산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만을 받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무런 걸림이나 문제, 어려움 없는 고속도로와 같은 탄탄대로, 만사형통만이 일어나야 한다고 기대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사명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대로 철저하게 살 때 바울이 당하는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 즉 영적인 공격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간파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을 끝까지 충성하며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바울이 당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작은 일과 어려움, 시험, 핍박, 모욕, 상처를 받으면 견디지 못해 합니다. “어떻게 내게 이럴수 있느냐?” 고 분노합니다. 참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 같은 마음이었다면 바울과 실라는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며 항의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나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다. 나한테 이렇게 할 수 없다.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따져보자”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울과 실라는 아무 말하지 않고 그 수모, 그 매, 그 억울함, 그 매임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믿는 자들, 내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음을 아는 자들은 잠잠할 수 있습니다. 그 고난과 어려움, 비난과 모욕, 아픔과 고통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의 과정들을 보십시오. 아무 죄가 없이 모함을 받고, 고소를 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채찍을 맞으시고, 매질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손과 발에 못을 박히시어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도살장의 어린양처럼 잠잠하셨습니다. 그 고난과 고통을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요셉 또한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우물을 빼앗겼던 이삭도 그러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명령, 그리고 그 받은 은혜와 사랑 때문에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헌신하고, 주님의 교회와 맡겨주신 직분을 감당하고자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감당할 때 오늘 빌립보에서 바울이 당한 일들을 기억하시고, 바울이 보여 준 믿음의 모습을 기억하여 우리 또한 바울이 보여준 그 모습, 잠잠히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역사하실 선하신 하나님의 손길과 뜻을 기다리는 신앙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Category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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