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24:1-5
1 닷새 뒤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몇몇 장로와 더둘로라는 변호사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하였다.
2 바울을 불러내니, 더둘로가 고발하여 말하였다. “벨릭스 총독님, 우리는 총독님의 덕분으로 크게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하의 선견지명의 덕택으로, 이 나라에서는 개혁을 많이 이룰 수 있었습니다.
3 우리는 어떤 면으로나, 또 어디에서나, 이것을 인정하며, 감사하여 마지않습니다.
4 나는 총독님을 오래 방해하지 않겠으니,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우리의 고발을 잠깐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5 우리가 본 바로는, 이 자는 염병 같은 자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소란을 일으키는 자요, 나사렛 도당의 우두머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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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다윗, 요셉, 다니엘, 막달라 마리아 같은 사람들을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사람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사람이다 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 그들이 했던 행동들을 보면 바보 같은 행동을 하며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자기를 시기하고 미워하여 죽이려고 했고, 자기를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을 복수하지 않고 용서하고 그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나라를 위해 크게 공을 세운 자였습니다. 아무런 잘못한 것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시기하여서 그토록 죽이려고 했고 그로 인해 광야와 사막으로 피해 수년간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더 이상 도망할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굴에 숨어 있는데 사울 왕이 뒷일을 보려고 자기가 숨어 있는 굴로 혼자 들어온 것입니다. 무방비입니다. 단칼에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다윗과 함께 한 장군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단칼에 죽입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찌되었든 그는 하나님이 기름 부은 사람이다”라고 사울 왕을 죽이지 않고 보냅니다. 그 사실을 알고 다시는 사울 왕은 크게 감동하고 회개하며 더 이상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돌아갑니다.
하지만 얼마되지 않아 다윗을 다시 잡아 죽이겠다고 군대를 끌고 옵니다. 사울 왕이 천막에서 자고 있을 때 부하와 함께 사울 왕의 천막에 들어갑니다. 다윗의 부하는 자신이 한 창에 죽이겠다고 하지만 여전히 죽이지 않고 자신이 사울 왕에 대한 원망이나 죽이려는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옷자락만 짤라 나옵니다. 그리고 또 다시 도망 다닙니다. 죽이면 끝인데. 얼마나 바보입니까? 막달라 마리아를 보십시오. 그 당시 향유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에게는 전 재산입니다. 그런데 그 향유를 예수님께 붓습니다. 사람들에게 욕을 먹습니다. 바보 소리를 듣습니다.
자세히 보면 이 세상에서 예수를 제대로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바보” 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정상입니다. 토요일 이 새벽에 예배하고 기도하겠다고 교회에 나가고, 하루 쉬는 주일에도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며 봉사하고, 정말 힘들고 어렵게 돈을 번 돈의 10분의 일을 감사하며 십일조로 헌금으로 드립니다. 세상 사람의 개념으로 보면 바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믿는 사람은 답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그런 바보들입니다. 돈 내고 봉사하는 바보. 피곤한데 일어나 기도하겠다고, 예배를 드리겠다고 나오는 그런 바보. 잘해야 본전이요 못하면 욕 듣고 마음에 상처 받는 섬기는 자리에서 힘들고 어려워도 섬기는 바보.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상대방을 먼저 찾아가 화해를 하는 바보. 복수하고 원망하고 미워해야 하는데 용서하는 바보.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바보들을 사랑하십니다. 기뻐하시고 그런 바보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바울을 보면 그런면에서 바보 중에 바보입니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돈을 데주는 것도 아닌데 천막 짓는 직업을 하면서 돌을 맞으며, 유대인들의 핍박과 험담과 욕을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전하며 다닙니다. 바보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잡혀서 이스라엘 북쪽 지역인 가이사랴 라는 도시로 후송되어 갑니다. 그때 이스라엘을 담당하던 총독이 벨릭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기에 바울을 죽이려고 유대인들이 고소를 했기에 총독이 있는 가이사랴로 바울을 후송한 것입니다. 벨릭스 총독이 바울을 재판하는 내용이 24장의 내용이고 25장은 벨릭스 다음에 총독으로 온 베스도가 재판을 하는 내용이고 26장에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대 헤롯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가 재판을 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가이사랴로 후송되어 온지 5일만에 총독 벨릭스가 바울을 재판합니다. 1절 “닷새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몇몇 장로와 더둘로라는 변호사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하였다”총독 벨릭스에게 바울을 고소하면서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 총독인 벨릭스에게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라고 판결한 빌라도와 같습니다. 벨릭스가 권력자입니다.
재판이 시작되면서 유대인 장로와 더둘로 그리고 아나니아 대제사장이 총독 벨릭스에게 어떤 말로 고소를 합니까? 2-4절 “벨릭스 총독님, 우리는 총독님의 덕분으로 크게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하의 선견지명의 덕택으로 이 나라에서는 개혁이 많이 이룰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면으로나, 또 어디에서나 이것을 인정하며 감사하여 마지 않았습니다. 나는 총독님을 오래 방해하지 않겠으니,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우리의 고발을 잠깐 들어주시기 바랍니다여” 개역 성경에는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무지하옵나이다”
벨릭스는 그 당시 악한 주지사로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뒤에 보면 알지만 공정한 재판을 하는자가 아니라 피고자에게 뇌물을 바라는 탐관오리 형 총독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재판에서 벨릭스의 마음을 얻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벨릭스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 마음을 얻으려고 아부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갑니다. 내게 이익을 주는 사람에게 아부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바보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총독 벨릭스에게 말하는 10절을 보면 아부하지 않습니다. “총독님께서 여러해 동안 이 나라의 재판장으로 계신 것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내가 한 일을 변호하겠습니다” 아부하는 말이 없습니다.
16절에도 “그러므로 나도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힘쓰고 있습니다”바울은 벨릭스 총독에게 아부하지도 않습니다. 진실만을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변호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제가 고소당한 것처럼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내가 전한 복음은 구약에 예언된 것이고 바로 바른 하늘에 대한 부활의 소망입니다“ 라고 자신의 신앙고백을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눈앞에 이익과 편안함과 내 원함이 이루어진다면 아첨도 하고 아부도 하고 자기 양심도 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라고 말하고 거짓이라고 말하고 도둑질이라고 말하는 것을 융통성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보로 살아가는 것은 정직함입니다.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힘쓰는 삶입니다. 그것이 바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벨릭스도 그 도와 관련된 일을 자세히 알고 있었으므로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당신들의 소송을 처리하겠소 하고 말하고서 신문을 연기하였다” 라고 말합니다. 바울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판결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26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는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하고 은근히 바랬다” 총독이었던 벨릭스는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옳고 그름이나 유대인들의 고소의 내용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뇌물을 주냐 안주냐에 따라 판결을 하는 자였습니다. 26절에 돈을 바랄까하여 라고 쓰여 있는 것은 바울이 벨릭스가 돈을 바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바울이 벨릭스 총독에게 뇌물만 넣어 주면 쉽게 금방 풀려 날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뇌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뇌물을 주지 않았기에 때문에 무려 2년이란 시간을 감옥에 갇혀 삽니다. 약간의 뇌물을 주지 않아서 그 위대한 사도바울이 2년간을 감옥에서 썩은 것입니다. 세상의 방법을 따른다면 조금 뒷돈 주고 빨리 나오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뇌물 좀 주고 빨리 감옥에 나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2년간 감옥에 있음으로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이고 감옥에 있음으로 복음이 더 전파되지 못하기에 손해 본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뇌물만 조금 주면 쉽게 풀려 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2년간 감옥에 들어가 있는 것은 바보 같은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융통성이 없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그러한 바보의 모습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세상의 방법으로 빨리 문제가 해결되고 편해지는 방법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감옥에서 2년을 갇혀 살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감옥에서 빨리 나와 편하게 살기를 원합니까? 2년 감옥에 있더라도, 조금 더 늦는다고 생각할지라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바보로 살기 원하십니까? 성도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바보처럼 보이는 것이 정상입니다.
5절에 더들로라가 사도 바울에 대해 이렇게 고소합니다. “우리가 본 바로는, 이 자는 염병 같은 자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소란을 일으키는 자요, 나사렛 도당의 우두머리입니다”그 당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로마 총독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폭동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를 알면서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허락한 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폭동을 두려워해서가 아닙니까? 더들로는 유대를 다스리는 총독들의 가장 싫어하는 약점을 아는 것입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은 점염병을 퍼트리는 사람이고 소란 즉 조용하고 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변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더들로는 바울을 험담하는 말로 고소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말이 맞습니다. 바울이 가서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삶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에 전염되어서 다른 사람이 되어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전염병처럼 번져야 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를 통하여 예수가 퍼져 나가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숨어 다닙니다.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말합니다. 불교, 천주교, 그리고 기독교는 가능하면 선택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성도들이 바보가 아닌 똑똑이로 여전히 살아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처럼 바보처럼 희생하고 용서하고 순종하고 끝까지 사랑하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손해 보지 않고, 내 자존심 상하면 참지 못하고, 내 편안함, 내 이익, 내 원함, 내 감정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보를 원하십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는 바보,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 세상의 이익이 아닌 손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바보. 세상을 보는 자가 아닌 하나님을 보는 바보. 세상을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바울과 같은 바보를 찾으십니다. 예수 사랑 때문에 손해를 봐도 괜챦아 하고. 욕을 들어도, 사람들이 오해하고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도 아무도 섬기지 않으려고 하는 자리에서 섬기는 바보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러한 바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