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18:12-17

12 그러나 갈리오가 아가야 주 총독으로 있을 때에, 유대 사람이 한패가 되어 바울에게 달려들어, 그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서,
13 “이 사람은 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바울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 사람에게 말하였다. “유대 사람 여러분, 사건이 무슨 범죄나 악행에 관련된 일이면, 내가 여러분의 송사를 들어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오.
15 그러나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여러분의 율법에 관련된 것이면 여러분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시오. 나는 이런 일에 재판관이 되고 싶지 않소.”
16 그래서 총독은 그들을 재판정에서 몰아냈다.
17 그들은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들어다가 재판정 앞에서 때렸다. 그러나 갈리오는 이 일에 조금도 참견하지 않았다.

————————————————-

오늘 본문의 사건은 바울이 2차 선교에 고린도에 내려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서 그들의 집에 머물며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친지 약 1년6개월이 되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성적으로 타락한 도시, 죄악으로 가득한 고린도를 보고 바울이 두려운 마음, 낙심하는 마음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두려워하지 말아라. 말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라. 이 도시에 내 백성이 많이 있다” 라는 말씀에 힘을 얻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침으로 고린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는 상황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핍박과 공격이 생깁니다. 12-13절입니다. “그러나 갈리오가 아가야 주 총독으로 있을 때에, 유대 사람이 한패가 되어 바울에게 달려들어, 그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서 이 사람은 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아가야 주라는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카운티나 주를 말합니다. 고린도는 카운티나 주에 속한 도시인 것입니다. 갈리오가 아가야 주 총독으로 있을 때 라는 말은 지금의 주지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1년 6개월간 머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말씀을 가르침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생겨나며 교회가 세워졌을 때 유대인들이 한패가 되어서 바울을 고소하여 주지사 아가야 앞에 데려 간 것입니다. 바울을 고소한 내용은 “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법을 어긴다는 것은 사회 규범이난 고린도 시에서 규정한 법이 아닌 구약의 율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선동한다는 고소의 내용은 율법이 말하는 방식이 아닌 율법을 어기면서 잘못된 방법과 방식으로 하나님을 공경, 즉 하나님을 믿으라고 잘못된 이단 사상을 가르치고 있다고 고소한 것입니다.

유대인이 자랑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율법입니다. 자신들이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받은 율법을 지킴으로 자신들은 의로운 자, 구원 받은 자, 하나님의 백성,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할례를 행하고,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철저하게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할 하나님께서 보내시겠다고 예언된 구원자 메시야는 자신들을 식민지 생활에서 구원하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다윗왕 때와 같이 부국으로 만들 왕이나 장군을 기대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과 구원은 그들이 붙들고 있는 가치관, 구원관, 신앙관을 완전히 무너트리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어 구원을 성취하라는 것이 아닌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구원자 메시야를 의지하고 믿으라고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시고 의롭다 함을 얻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로 예수를 보내셨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메시야 구원자이시며, 예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나라를 로마 제국에서, 식민지 생활에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닌 우리의 죄에서,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으심으로 희생제물이 되신 것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즉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은혜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지금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요 축복의 말씀이지만 그동안 율법을 붙들고,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고 힘쓰고 애썼던 유대인들에게는 그 복음, 그 말씀이 쉽게 받아 들일 수 없는 가르침이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들이 붙들고 지키던 것들이 잘못된 것이요 헛된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것을 넘어 기분 나쁜 일이요, 잘못된 이단의 가르침이라고 거부하고 분노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와서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었습니다. 18:4절을 보면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토론을 벌이고,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을 설득하려 하였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고, 설명하고, 믿게 하려고 했지만 6절을 보면 “그러나 유대 사람들이 반대하고 비방하므로, 바울은 그의 옷에서 먼지를 떨고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멸망을 받으면, 그것은 오로지 여러분의 책임이지 나의 잘못은 아닙니다. 이제 나는 이방 사람에게로 가겠습니다” 라고 유대인들이 아닌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 사람들과 그 외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가 세워지고 부흥해 가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시기한 것입니다.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전하는 복음을 막고 방해해야 했습니다. 사단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몇몇 되지 않아 힘이 없어 방법을 찾다가 갈리오 아가야 주 총독을 찾아가 고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한 내용을 듣고 갈리오 총독은 그들의 고소를 받아 들이지 않고 그들을 돌려 보냅니다. 그 이유를 14-1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갈리오가 유대 사람에게 말하였다. “유대 사람 여러분, 사건이 무슨 범죄나 악행에 관련된 일이면 내가 여러분의 송사를 들어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오. 그러나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여러분의 율법에 관련된 것이면, 여러분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시오. 나는 이런 일에 재판관이 되고 싶지 않소”

가이오는 로마에서 온 총독입니다. 우리가 알듯이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에 허락했던 빌라도 총독도 로마에서 왔던 총독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독단적이고 종교적인 우월감을 가진 민족이라 늘 종교적 문제로 갈등과 분란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가지고 온 고소가 종교적인 것이라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라고 단칼에 자른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을 고소한 내용이 국법이나 사회법 즉 다른 사람을 폭행하거나, 피해를 입혔거나 부정하고 불량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며 알아서 처리하라고 한 것입니다.

가이오 총독의 모습속에 빌라도 총독의 모습이 보입니다. 빌라도 총독도 예수님을 고소한 대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종교적인 부분으로 고소한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불법을 행하거나 사형에 처할 만한 모반이나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의도가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유대인을 선동하여 그들이 원하는바대로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을 하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에게 아무러 죄가 없다는 것을 시사하는 손을 씻고 그들이 원하는대로 내어 준 것입니다.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유대인들의 완고함을 다시 한번 봅니다. 그들의 완고함을 통하여 우리가 조심해야 할 신앙의 모습을 또한 보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내가 경험하고, 내가 옳다고 믿고,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고 붙들고 있는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기도는 이렇게 해야 하고, 행동은 이렇게 해야 되고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내가 옳다고 하는대로 따라 와야 한다고 하는 마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심기가 불편합니다.

분명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진리에 관한 부분이라면 붙들어야 합니다.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것이라면 양보하고,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관용이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자 행한 일이 17절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들어다가 재판정 앞에서 때렸다” 바울을 고소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그 화풀이를 회당장에게 한 것입니다. 회당장이 바울을 회당에 들어오게 했었고 복음을 전하도록 했다는 것을 꼬투리 잡아 화풀이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분별력과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붙들어야 하고, 받아 들여야 하고, 전해야 할 복음의 진리를 바로 알게 하시고 그 외에 포용하고, 넘어가도 되는 것을 알 수 있기를 기도하기 원합니다.

Category말씀 묵상
Follow 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