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1:1-3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사람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2 우리는 여러분 모두를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3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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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이 하나님의 뜻대로 2차 선교여행 중에 세워지게 된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소아시아 즉 터어키 지역에서 배를 타고 유럽인 그리스 마게도니아 지역으로 가서 빌립보 성에서 복음을 전했고 두 번째 간 곳이 데살로니가였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의 회담에서 복음을 삼주간 전하였는데 많은 그리스인들과 귀부인들, 그리고 회당장인 야손까지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고 반대하던 유대인들의 극한 방해와 박해로 그곳에 더 이상 머물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베뢰아 성으로 갑니다. 그러나 그곳까지 유대인들과 불량배들이 쫓아와 바울을 잡으려 하자 할 수 없이 더 멀리 고린도로 움직이고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가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잠시 머물러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을 받은 성도들이 교회를 이루며 복음을 전하며 신앙생활을 하였지만 그들을 핍박하고 방해하는 유대인들로 인해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것을 알고 있는 바울은 걱정하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어떻게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걱정되는 마음에 사람을 보내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에 대해 소식을 알아 보았을 때 놀랍게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과 함께 있었을 때의 그들의 모습, 그리고 전해서 들은 그들의 모습을 생각하고 기억하면서 편지를 보냅니다. 1-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사람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우리는 여러분 모두를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 그들을 기억할 때 하나님께 언제나 감사를 드린다고 말합니다. 무엇 때문에 감사한다고 말합니까? 3절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 그들에게 세가지,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기억하고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가져야 할 세 가지가 바로 믿음, 소망, 사랑이 아닙니까? 놀랍게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이 믿음, 소망, 사랑의 모습을 고난과 핍박, 어려움 속에서도 지키고, 행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기억하고, 그 모습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언제가 감사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모습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3절을 보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믿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행위”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었습니다. 믿었다는 것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기준을 몰랐기에, 하나님께서 왕이시오 삶의 주인인줄 몰랐기에 육신의 생각과 뜻대로 산 것이 죄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죄의 형벌인 지옥의 형벌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대신 갚으신 것을 믿고 구세주와 주님으로 마음에 영접한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선한 행위나 노력과는 상관이 없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되어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구원 받은 자, 진정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 다음에 믿음의 행위가 나타납니다. 그동안 행하던 나 중심의 삶, 육신의 정욕과 욕심을 따라 살던 죄를 회개하고 그 모습을 버립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선한 삶, 즉 용서와 섬김, 말씀과 기도, 낮아짐의 삶, 악한 말, 험담, 비난과 정죄함을 버리고 사랑과 용서의 삶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짓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과 뜻대로 살아가는 삶을 통해 거룩함이 나타납니다. 나 자신이 보아도, 다른 사람이 보아도 예수 믿더니 달라졌다는 소리가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르다는 말을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행위가 나타나야 살아 있는 참된 믿음이요 진정 구원 받은 자라는 열매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진정 구원 받은자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야고보서 2장에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분명하게 도전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삶에 변화가 나타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답게 믿음으로 살기 위해 손해도 보고, 결단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세상과 구별된 삶, 하나님 말씀대로 믿음으로 순종하기에 애를 씀으로 믿음의 행위가 보였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음의 행위가 드러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머리로, 입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죽은 믿음이 아닌 삶에 믿는 자다운, 예수의 성품을 닮은 구별된 삶이 있기를 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는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참된 사랑,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랑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헌신과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사랑한다는 말은 단지 좋아하는 것을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I love him” 이라는 말은 사실 “나 저 사람 좋아해” 왜 좋아합니까? 착하니까. 멋지니까. 내 마음에 드니까. 나한테 잘하니까.
교회 안에서도 좋을 때는 서로 만나면 웃고, 인사하고,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어떤 일이나 사건, 말로 인해 기분이 상하고, 마음이 불편하면 그런 모습 싹 사라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진정 사랑하면 인내와 견딤을 감당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듣지 않고, 속을 썩여도 참고 견디고 기다려 주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도 얼마나 오래 참으심과 인내하심, 그리고 얼마나 큰 희생을 치루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 아들의 생명까지도 내어 주신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라는 사랑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랑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섬김의 수고, 기다림의 수고, 인내의 수고, 고통을 견디는 수고, 도움의 손길을 주는 수고, 내 마음에 들지 않고 잘못된 길로 갈 때 참아주고 인도하는 수고.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성도 간에 사랑하는 수고를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교회 안에 그러한 참된 사랑의 수고가 있는 사랑의 사람과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가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과 핍박을 많이 당한 교회입니다. 6절에 “여러분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난과 환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소망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으면 인내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거나 좌절, 포기하지 않고 감당해 나갈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환난 중에도, 고난과 핍박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었기에 주님을 본 받는 믿음의 사람으로 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서 옵니까? 첫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라는 확신 속에서 오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 않은 것은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둘째 하나님을 바라볼 때 오는 것입니다. 시편 43: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의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환경을 바라볼 때 환경이 흔들리면 함께 흔들립니다. 사람을 바라보면 사람이 흔들릴 때 함께 흔들립니다. 그러나 어제나 오늘이나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낙심될 때 빛이 보이지 않을 때 무릎을 꿇으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하나님께서 소망을 주시고 빛을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