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20:6-12
6 우리는 무교절 뒤에 배를 타고 빌립보를 떠나, 닷새만에 드로아에 이르러, 그들에게로 가서, 거기서 이레 동안을 지냈다.
7 주간의 첫 날에, 우리는 빵을 떼려고 모였다. 바울은 그 다음 날 떠나기로 되어 있어서 신도들에게 강론을 하는데, 강론이 밤이 깊도록 계속되었다.
8 우리가 모인 위층 방에는, 등불이 많이 켜져 있었다.
9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바울의 말이 오랫동안 계속되므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몹시 졸다가 삼 층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이 일으켜 보니, 죽어 있었다.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에게 엎드려, 끌어안고 말하기를 “소란을 피우지 마십시오. 아직 목숨이 붙어 있습니다” 하였다.
11 바울은 위층으로 올라가서 빵을 떼어서 먹고 나서 날이 새도록 오래 이야기하고 떠나갔다.
12 사람들은 그 살아난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래서 그들은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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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사도바울이 3차 선교 중에 에베소에서 3년의 사역을 마친 후에 2차 선교에 갔던 지역들을 돌아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중에 마게도니아 지역의 빌립보를 떠나 드로아에서 일주일간 있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드로아는 지금의 트루키예, 즉 터어키에 트로이입니다. 트로이 목마로 유명한 곳이 바로 드로아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떠나는 마지막 날 저녁에 말씀을 전합니다. 그때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 앉아서 들었다는 것을 보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속에서 생각지 못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20:9-10절입니다.“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바울의 말이 오랫동안 계속되므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몹시 졸다가 삼층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이 일으켜 보니 죽어 있었다. 바울이 내려가서 그에게 엎드려 끌어안고 말하기를 소란을 피우지 마십시오. 아직 목숨이 붙어 있습니다 하였다”사도 바울이 3차 선교 여행때 드로아 지금의 트로이 라는 지역에서 선교를 할 때 사도 바울이 설교를 하는데 밤 늦도록 설교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두고라는 청년이 3층 창문에 걸터앉아서 설교를 듣다가 바울의 설교가 오랫동안 계속되므로 졸다가 삼층에서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이 사건을 보고 어떤 성도님들은 이래서 설교는 짧아야 한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설교는 짧아야 은혜가 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설교가 길었기 때문에 유두고가 죽었다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목사님들은 다르게 해석합니다. “설교 시간에 졸면 죽을 수 있다” 재미 있게 하시는 말들 같습니다.
하지만 유두고가 왜 죽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두고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 들이고 바라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유두고가 설교시간에 졸다가 떨어졌습니다. 그 유두고를 보고 9절에 사람들이 보고 “죽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10절에 그 유두고를 보고 사도 바울은 “목숨이 붙어 있다, 살았다” 라고 말하며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말합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왜 다른 사람들은 죽었다고 하는데 사도 바울은 살았다 라고 말합니까?
유두고가 삼층 창문에서 떨어졌지만 죽은 것이 아닌데 사람들이 죽은 것으로 잘못 보았기 때문이었을까요? 분명 유두고는 죽은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을 찾아와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고 했던 회당장을 따라 그의 집에 가고 있을 때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딸이 죽었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이 더 이상 오실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시며 그의 집에 갑니다. 그 집에는 이미 사람들이 회당장의 딸이 죽었기에 울며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회당장의 딸이 죽은 것을 확인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었을까요? 바울이 유두고가 의학적인 지식이 없어서, 혹은 너무 놀라서 유두고가 죽은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회당장의 딸과 유두고가 육체적으로는 죽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바울은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믿음과 뜻을 알 때 세상이 하는 말과 다른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해석과 다른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대로, 나의 능력과 힘으로 판단하고 해석하여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바른 판단이고, 바른 해석입니다. 그렇기에 삼층에서 떨어진 유두고가 죽은 것을 보고 “죽었다. 큰일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냐?” 라고 소란을 피운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 속에서, 삼층에서 떨어져 숨이 끊어진 유두고를 본 바울은 “소란을 피우지 마십시오. 아직 목숨이 붙어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유두고가 3층에서 떨어져서 사람들이 죽었다고 소란을 피울 때 사도 바울은 그 상황을 “왜 위험하게 창문에 걸터 앉아 있었나? 왜 옆에서 못앉게 막지 않았냐? 왜 설교 시간에 왜 졸았냐? 유두고의 잘못이다, 주변 사람의 잘못이다” 라고 비난하거나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잘 쓰는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 사람 그럴 줄 알았어”“나는 그 일이 그렇게 될줄 알았어”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알았으면 말리고 바로 잡아야지 왜 알았는데 왜 잠자코 있었습니까?
바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죽은 청년 유두고를 살렸는지 본문에 나오지 않지만 사도 바울이 바로 유두고를 껴안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 주실 것이라는 분명한 믿음과 성령의 감동하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간절히 살려 달라고 믿음으로, 담대함으로 기도함으로 유두고가 살아났고 청년 유두고는 집으로 돌아갔고 그로 인해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그 살아난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래서 그들은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
오늘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바울의 믿음, 우리가 어떤 상황이나 사건 속에서 가져야 할 바른 믿음의 해석이 무엇인가를 깨닫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일어난 일을 다른 사람 탓을 하거나, 비난하고 정죄하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난다고 말하며 기도하는 믿음의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죽었다. 안된다. 끝났다. 그럴 줄 알았다” 라고 나하고 상관없는 일처럼, 소망없는 세상의 해석이 아닌 이 일 가운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변화시키시고, 살리심으로 위로 받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을 믿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신앙으로 서기를 축원합니다.
죽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사람들이, 현실이 죽었다고 말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살았다 라고 하면 산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긍정적 사고가 아니라 성경적 사고입니다. 메뚜기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의 밥이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문제 앞에서 도망하지 마십시오. 정면 돌파 하는 신앙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 형편, 내 생각, 내 능력, 그리고 상황을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역사하실 하나님을 믿고 담대하게 힘 있게 주님의 이름으로 일어서는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