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디모데후서 3:1-3

1 그대는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말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입니다.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3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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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에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 죄 된 모습이 무엇인가를 3절에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라고 알려 줍니다. “무정하며” 라는 것은 “Without Love” 즉 사랑이 없는 마음이라는 뜻이고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라는 것은 “Unforgiving” 즉 용서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무정 즉 사랑이 없기 때문에 원한을 풀지 않는 것입니다. 즉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용서함이 없는 것입니다. 자식은 아무리 잘못을 해도, 한두번도 아닌 수십번 속 썩이는 일을 해도 부모는 용서합니다. 왜 용서합니까? 자식을 사랑하니까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미워하거나 내치지 않고 끝까지 품고, 용납하고, 용서하고,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말세가 악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무정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가장 큰 계명인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니까, 깨닫지 못하니까 사랑이 아닌 무정과 원한을 풀지 않고 미워하고 복수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입니까? “그래서”의 사랑입니다. “그 사람이 내게 잘 하니까? 하는 짓이 내 마음에 드니까? 나와 같은 생각, 같은 색깔, 같은 편이니까” 그래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무정하게 대합니다. 차갑게 대합니다. 눈을 흘깁니다. 밀쳐내고,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그래서” 가 아닌 “그러나”의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을지라도”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원수 같은 삶을 살고 있을 때, 전혀 사랑 받을 만한, 마음에 들 만한 일이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결국 그로 인해 망해야 하고, 저주 받아야 마땅한데도 불쌍히 여기고 자격이 되지 않는데 거저 주는 은혜를 베푸신 사랑입니다. 먼저 용서하고 죄를 없애주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시고 생명을 희생하신 사랑입니다.

말세에 사람들은 점점 더 자기 자신을 사랑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의 이익, 권리, 원함, 편리, 뜻대로 되는 것을 이기적으로 추구합니다. 쉽게 화해하지 않고 끝까지 미움을 품는 마음을 갖고 삽니다. 내가 받은 상처, 내가 받은 손해, 내가 받은 자존심과 기분 나쁜 것을 붙들고 삽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며 내가 의롭고 상대방이 잘못했기에 그 사람이 내가 원하는 태도와 모습으로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하겠다는 교만한 마음을 갖고 있기에 화해됨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에 화해, 용서가 아닌 비난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상대방에 대해 나쁜 마음을 갖도록 좋은 것은 다 빼버리고 나쁜 말을 확대시키고 옮깁니다. 3절에 ‘비방하며’ 라는 비방이라는 단어인 ‘디아볼로이’라는 말은 ‘마귀’를 뜻하는 말로 거짓된 말과 중상모략으로 남을 해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요소입니다.

말세에 이러한 모습이 점점 더 강해집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집니다. 흥행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주제가 이러한 복수와 비난, 상대방에 대한 철저한 응징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통쾌하다. 잘 했다” 라고 박수를 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그러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동기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래서”의 사랑이 아닌 “그러나” 의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원망과 비방, 정죄의 사단의 마음이 아닌 감사와 소망과 축복의 마음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누군가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비난의 말, 불필요한 말, 험담의 말이 아닌 좋은 말, 인정하는 말, 칭찬하는 말을 하는 입에 파숫군을 세우는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3절에 이어서 말세에 점점 드러나는 모습이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라고 알려 줍니다. 절제가 없다는 것은 참을성이 없고, 자제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참는 것을 견디지 못해 합니다. 이 시대를 인스터트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편지를 보내 몇 일, 몇 주를 기다려서 받고 보냈습니다. 이제는 바로 이 메일로 보내고 받습니다. 카톡으로 문자를 보내고 받습니다. 보냈는데 몇 시간이 지나도 답이 없으면 견디지 못해 합니다. 물건 주문도 이제는 한국은 당일 배송, 미국도 이제는 Overnight 혹은 다음날 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영향도 있어서겠지만 우리의 죄성은 점점 더 기다림, 참음, 인내함이 없습니다. 말세에 사람들은 더욱 더 누가 뭐라고 하든지 상관없이 자기 하고 싶은 말, 내 감정 그대로 드러내고 말합니다. 더 분노함을 참지 않습니다. 어려움, 힘듬을 참지 않고 않하겠다, 못하겠다고 바로 드러냅니다. 사단은 말세에 점점 더 사람들에게 그러한 죄성을 드러내게 합니다. 그것이 정신 건강에 더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악입니다.

우리를 그런 악한 마음에서 선한 마음을 가지고 살게 하는 것은 참고 절제하는 능력 때문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절제함이 선을 이룹니다. 절제함이 우리에게 많은 이익을 줍니다. 놀고 싶을 때 참고 공부하는 것이 유익입니다. 돈을 쓰는 것도 절제할 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는 유익을 줍니다. 먹는 것도 절제할 때 건강해집니다. 감정도, 말도 참고 절제할 때 관계가 좋아집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것이 난폭함으로 이어져 선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3절의 말씀입니다.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진정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고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은 난폭하지 않습니다. 사납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순한 양과 같아집니다. 선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선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선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말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선이 아닌 악이 나오고, 죄가 나오고, 난폭해지고 절제함이 없어지고 용서함이 없고 사랑함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선한 목자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고 예수님께서 양과 같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우리가 믿고 따르기에 우리를 향하여 디모데전서 6:12절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말세에 나타나는 모습들을 돌아보면서 내 마음에 그러한 죄악들이 자리 잡지 못하고 행하지 않도록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죄성과 세상과 사단이 부추기는 그러한 죄악들을 이기고 승리하는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 힘써 기도하며 성령의 충만함과 능력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Category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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