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2:22-24, 32-41
22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이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께서 기적과 놀라운 일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증명해 보이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23 이 예수께서 버림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을 따라 미리 알고 계신 대로 된 일이지만, 여러분은 그를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2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습니다. 그가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32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일의 증인입니다.
33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높이 올리셔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일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키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셨습니다’
36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37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38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9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또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말로 증언하고 비뚤어진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그들에게 권하였다.
41 그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그 날에 신도의 수가 약 삼천 명이나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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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마가의 다락방에서 나와 예루살렘 성에서 각 나라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크신 일을 전하자 어떻게 이 사람들이 배우지도 않은 외국말을 그것도 수십개의 다른 언어로 말할 수 있는지 놀라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성령님이 임하게 된 것이 술 취함이 아니라 구약의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며 얼마 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심으로 진정한 메시야 하나님 되심을 증명되었다고 선포합니다. 베드로의 이 설교를 통하여 놀랍게도 3,000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된 사건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과 말씀 속에서 베드로가 전한 복음 속에서 우리가 깨닫고 배워야 할 전도자의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다시 한번 분명히 알아야 할 복음의 내용, 회개해야 할 죄와 믿고 전해야 할 복음을 보기를 원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이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께서 기적과 놀라운 일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증명해 보이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의 중심은 예수가 누구신가였습니다. 3년간의 예수님의 공생에 속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기적들,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일, 눈먼 자를 보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시고,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치료하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신 그 놀라운 기적과 놀라운 일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버림을 받게 하신 일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지만 그 일은 바로 여러분들이 무법자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 박게 했다고 말합니다. 23절입니다. “이 예수께서 버림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을 따라 미리 알고 계신 대로 된 일이지만, 여러분은 그를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말합니다.
36절에도 다시 한번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주범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향해 네가 예수님을 죽게 했다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을 당하시고 피 흘려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이 시대로 말하면 성도들이 가장 싫어하는 설교였습니다. 속된 말로 나를 때리는 설교, 시험 들게 하는 설교였습니다. 즉 나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죄를 지적하는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돌이켰습니다. 이 사람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나를 때리는 설교, 나를 치는 설교, 나를 시험에 드는 설교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베드로가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를 십자가에 죽였다” 라고 하는 설교를 들었을 때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이 찔렸습니다. 아팠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을 때리는 설교, 나를 치는 설교를 들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37절입니다.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그러할 때 베드로가 38절에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라고 알려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임을 다시 한번 알려 줍니다. 39절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또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했을 때 41절을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 즉 때리는 설교, 나를 치는 설교를 받아 들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침례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그 날에 신도의 수가 약 삼천 명이나 늘어났다” 자신들의 죄를 회개한 것입니다. 즉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나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라고 인정하고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죄 용서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 집사의 설교가 나옵니다. 성령을 받은 스데반 집사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복음을 전함을 인하여 공의회에 끌려와서 고소를 당했을 때 2:22절에서 베드로가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이 말을 들으십시오” 라고 설교를 시작한 것처럼 7:2절에 “부형 여러분,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라고 하며 설교를 합니다. 스데반 집사의 설교는 우리가 오늘 읽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보다 훨씬 더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구약 전체를 요약하며 설명하는 설교였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의 설교 역시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던 것처럼 당신들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메시야 예수를 죽였다 라고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였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사도행전 7:54절을 보면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해서 스데반에게 이를 갈았다” 라고 합니다. 회개함이 없었습니다. 격분하고 분노하여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특별히 나의 마음을 찌르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의 모습처럼 “내가 어찌할꼬.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외치며 나의 죄를 깨닫고,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로 서기를 원합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자들처럼 격분하고 이를 갈며 나를 치는 설교다 라고 거부하여 멸망에 이르는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단순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것이 바로 나 자신이고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주님으로 믿어 침례를 받아 죄 용서함과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동안 행하셨던 기적이나 전했던 말씀들, 그동안의 행적들에 대한 내용도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정하신 구원의 계획과 뜻 가운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셨다는 단순한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베드로의 전함은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습니까? 그것은 첫째, 베드로가 직접 보고 들었고, 성령님의 충만함으로 깨달아지고 확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경험하고 성령님의 감동과 감화 속에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원자 메시야 되심을 확신했기에 담대하게, 그리고 거침없이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담대함과 확신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경험이 있습니까? 십자가의 복음이 나를 위한 복음입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를 위한 죽으심입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것이 바로 나요, 그 십자가의 죽으심이 나의 죄를 용서하신 대속의 죽으심임에 대한 확신과 감사가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정말 내가 예수를 개인적인 구주로 만났는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3:5절의 말씀과 같이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나를 만나 주신 예수, 나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 나를 살리시고 변화시키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믿음의 체험이 있어야 우리의 전함에 담대함이 있습니다. 흔들림이 없습니다. 온유함과 친절함, 인내함과 충성함으로 전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증거하고, 주님의 집으로 초대하고, 복음의 핵심인 예수 믿지 않는 것에 대한 죄 됨과 영원한 천국과 지옥에 대한 분명한 찔림이 되는 말씀을 전하는 것에 두려움이나 주저함이 있다면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순종함에, 섬김에, 희생과 사역에 힘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의 모습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단순한 복음과 설교에 3000 명이 회개했다는 것은 사람의 힘과 능력이나 어떤 설교의 스타일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하심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특별하거나 새로웠기 때문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감화 감동하심과 역사하심이 회개와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경험한 어떠한 진리, 더 나아가 내가 만난 예수님에 대해 아무리 확신과 간증을 전했다고 사람들이 다 이해하고, 감동하고,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지 않습니까? 더 나아가 내가 애쓰고, 섬기고, 기도하는 일들이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대로 일이 이루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전달자의 도구로 전하는 것이지만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있었습니다. 그 역사하심은 나의 죄를 드러내시는 역사였습니다. 찔리는 말씀으로 받게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와 스데반의 설교는 스타일은 달랐지만 설교의 내용은 같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예수를 하나님이시오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복음은 진리였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찔렀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설교를 듣고 듣는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찔림을 받았다는 것은 결국 성령님의 역사였습니다. 말씀을 들었을 때 내 마음에 찔림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찔림을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우리는 바른 반응을 해야 합니다. 찔림을 주시는 말씀에 내가 엎드려야 합니다. 나의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구원함을 받는 것입니다. 회복함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자들은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동일하게 마음에 찔림 받았지만 그 찔림을 회개함이 아닌 분노함과 이를 갈음으로 반응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더 큰 죄악을 지었습니다. 안타깝고 처참한 모습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스데반의 설교가 실패한 것 같았지만 우리가 알듯이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성령님께서는 그 현장에 있던 한 사람을 변화시키십니다. 바로 바울입니다.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의 죽음에 아무런 성령의 역사가 없고 열매가 없는 것 같지만 바울을 준비시켜 3000명이 아닌 그 이상의 영혼들을 구원시키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우리가 압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볼 때 실패한 것 같고, 열매가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과 선하신 계획속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고, 성령님께서 이루십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충만함 속에 담대함으로 흔들리지 않는 사역과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들려 주시는 내 마음을 찌르는 말씀을 들을 때는 다윗과 같이 바로 엎드려 회개하며 주님의 긍휼하심과 용서하심을 구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