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에스더 3:1-6
1 이런 일들이 있은 지 얼마 뒤에, 아하수에로 왕은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을 등용하여, 큰 벼슬을 주고, 다른 대신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혔다.
2 대궐 문에서 근무하는 신하들은, 하만이 드나들 때마다 모두 꿇어 엎드려 절을 하였다. 하만을 그렇게 대우하라는 왕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무릎을 꿇지도 않고, 절을 하지도 않았다.
3 모르드개가 그렇게 하니, 대궐 문에서 근무하는 왕의 신하들이 모르드개를 나무랐다.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지키지 않소?”
4 그들이 날마다 모르드개를 타일렀으나, 모르드개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침내, 그들은 하만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그들은 모르드개가 스스로 유다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으므로 그의 그런 행동이 언제까지 용납될 수 있는지 두고 볼 셈이었다.
5 하만은 모르드개가 정말로 자기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자기에게 절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화가 잔뜩 치밀어 올랐다.
6 더욱이 모르드개가 어느 민족인지를 알고서는 하만은 모르드개 한 사람만을 죽이는 것은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였다. 하만은 아하수에로가 다스리는 온 나라에서 모르드개와 같은 겨레인 유다 사람들을 모두 없앨 방법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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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모르드개와 하만의 갈등과 기 싸움으로 시작되어 아하수에로 왕의 대신이었던 하만이 모르드개만이 아닌 모르드개만이 아닌 그의 겨례인 유대 민족까지 모두 없애려는 마음을 갖게 된 사건을 말해 줍니다. 에스더서 2:5절부터 보면 모르드개는 이스라엘 사람이고 에스더의 삼촌이었습니다. 모르드개는 이스라엘 나라가 바벨론에게 함락되었을 때에 포로로 잡혀 온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멸망했을 때 에스더의 부모가 죽었고 모르드개가 조카 에스더를 데려다 길렀습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친딸처럼 훌륭하게 양육하고 가르친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왕비로 선택될 만큼 미모와 지성을 갖추게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궁궐 문에게 근무하는 하급자였습니다.
하지만 모르드개는 조국을 식민지 삼아 다스리고 있는 어떻게 보면 원수의 나라에서 살지만 그 나라 왕을 암살하려는 사람들의 음모를 미리 발견하고 저지시킨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2:21-23절을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에, 문을 지키는 왕의 두 내시 빅단과 데레스가 원한을 품고, 아하수에로 왕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 음모를 알게 된 모르드개는 에스더 왕후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또 에스더는 그것을, 모르드개가 일러주었다고 하면서, 왕에게 말하였다. 사실을 조사하여 보고, 음모가 밝혀지니, 두 사람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다. 이런 사실은, 왕이 보는 앞에서 궁중실록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장점만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큰 단점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단점으로 인해 아하수에로 왕의 총리였던 아각 사람 하만과 갈등이 시작됩니다. 하만은 능력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만은 페르시아 사람이 아닌 아각 사람, 즉 아말렉 사람이었습니다. 즉 다른 나라 사람입니다. 그런데 페르시아 대제국의 제 이인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에스더서에 나오는 그의 성품을 보면 자신의 지위를 내세우는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사소한 일로 이스라엘 온 민족을 죽이려고 했던 속이 좁고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복수를 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하만과 모르드개가 충돌합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할 때는 하만과 모르드개의 싸움과 갈등의 문제가 모두 악한 하만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계 속에 싸움과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는 한 사람의 문제 때문일 수 없습니다. 양손이 부딪혀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하만과 모르드개의 부딪힘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죽게 된 상황이 생긴 것은 단지 하만의 완악함 때문만이 아닌 모르드개에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모르드개에도 하만과 같은 기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서로 부딪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로 어떤 일로 싸우고 으르렁 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딪히는 사람들은 똑같이 상대방을 향해 “저 사람이 문제다” 라고 말합니다. “저 사람 성격이 너무 쎄서 나와 부딪힙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저 사람 성격이 쎄다고 말하는 그 분도 성격이 쎈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말하는 본인도 만만치 않게 쎄다는 것을 봅니다. 서로 쎄기 때문에 부딪히는 것이지 한 사람이 쎄고 한 사람이 쎄지 않으면 부딪히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기질, 같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을 보면 한나라는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나는 엘가나라는 남자의 아내였습니다. 한나처럼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산 여인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엘가나는 어쩔 수 없이 두 번째 아내인 브닌나를 얻습니다. 브닌나가 아들을 낳으면서 남편 엘가나의 사랑을 독차지 받고 있는 한나를 괴롭혔습니다. 사무엘상 1:6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으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겼다”후첩인 브닌나는 쎈 여자였습니다. 모난 여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집안에 어떤 일이 벌어져야 합니까? 당연히 한나가 브닌나와 싸우고 다투는 상황이 생길 것이라고 예측되지 않습니까?
창세기에 아브라함 가정에게도 동일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사라가 여종 하갈을 후첩으로 들여 보냈습니다. 하갈이 아들을 낳자 본처인 사라를 업신여겼습니다. 하갈은 브닌나와 같이 쎈 여자였습니다. 하갈이 자신을 업신여기자 사라가 어떻게 합니까? 부딪힙니다. 왜 부딪힙니까? 사라 역시 쎈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싸워서 안되니까 남편 아브라함에게 하갈을 집에서 내 쫓으라고 해서 내 쫒지 않습니까? 사라는 당하면서 살지 못하는 쎈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한나가 브닌나와 싸웠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한나는 쎄고 모난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쎈 브닌나가 괴롭히고 업신여기면 그저 당하면 맞고 우는 착한 여자였습니다. 많이 속상하면 먹지 않고 혼자 힘들어 하는 여자였습니다. 너무 힘드니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 한나의 기도를 보면 “브닌나 그년을 박살 내주소서. 그년을 쫓아내소서” 사라처럼 그러지 않았습니다. 한나가 브닌나로 인해 힘들어 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의 내용을 보면 브닌나 이름은 꺼내지도 않습니다. 단지 자신의 아픔과 상황과 필요를 흐느껴 울면서 기도합니다. 사무엘상 1:10 “한나는 서원하며 아뢰었다. 만군의 주님, 주님께서 주님의 종의 이 비천한 모습을 참으로 불쌍히 보시고 저를 기억하셔서 주님의 종을 잊지 않으시고 이 종에게 아들을 하나 허락하여 주시면 저는 그 아이의 한평생을 주님께 바치겠습니다”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한나 같은 여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브난나와 사라 같은 성도가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쎈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빛의 자녀는 착하다 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악을 선으로 갚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위하여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 눈에는 누구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와 내가 부딪히고 있다면 그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그 사람과 같은 모난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저 사람 참 무례하다” 라고 말하며 들먹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보면 무례합니다. 무례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무례함을 참지 못하고, 교만한 사람은 교만한 사람을 견디지 못해 합니다. 반면에 무례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무례함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은 사람이면 다른 사람의 교만함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내 눈에 다른 사람의 교만함이 보이고 그 사람의 교만함 때문에 견디지 못하면 “아 내가 교만하구나” 라고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원리를 알면 내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함이 보이는 부분, 지적하는 그 지적이 바로 나의 단점일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내가 비난하는 대상, 내가 싫어하는 대상이 사실은 내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부분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내가 변화를 구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과 단점, 눈에 거스리는 것이 많이 보이는 분은 성령충만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신앙으로 성숙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신앙이 성숙하고 성령이 충만하면 사람들을 볼 때 단점과 실수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보여도 내가 도와줘야할 부분이구나 이런 마음이 듭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과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기를 바라는 것이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보이는 단점들이 나의 단점을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것을 알고 나의 모난 부분들, 상대방의 단점들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모습에서 벗어나려는 노력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모르드개가 하만과 부딪히고 문제가 생긴 것은 하만의 교만함과 완악함 때문만이 아닌 모르드개 안에 하만과 같은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르드개가 가지고 있던 하만적인 요소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고집과 아집이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자존심이었습니다. 하만이 모르드개에 대해 분노하고 모르드개를 죽이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 전부를 죽이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모르드개의 고집과 아집 때문이었습니다. 상관인 하만에게 인사하지 않는 모르드개의 고집과 아집 때문이었습니다.
모르드개의 직책은 대궐 문에서 근무하는 자였습니다. 하만은 어떠했습니까? 3:1절에 “아하수에로 왕은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을 등용하여 큰 벼슬을 주고 다른 대신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혔다” 하만은 아하수에로 왕 다음인 국무총리였습니다. 나라의 이인자였습니다. 에스더 3:2 “대궐 문에서 근무하는 신하들이 하만이 드나들 때마다 모두 꿇어 엎드려 절을 하였다. 하만을 그렇게 대우하라는 왕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무릎을 꿇지도 않고 절을 하지도 않았다”
하만은 모르드개보다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국무총리인 하만에게 엎드려 절하라는 왕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상관이요 왕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만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모르드개가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이유는 1절에 있습니다. 하만이 아각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각 사람은 바로 아말렉 족속을 말합니다. 아말렉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싫어하는 족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의 길을 갈 때 야비하게 뒤에서 공격한 족속입니다. 미워할 만한 족속입니다.
아말렉 족속을 미워했기 때문에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말렉 사람에게는 그가 아무리 높은 상전이라도 내가 절할 수 없다 라는 자신의 고집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아각에게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모르드개가 목숨을 걸고 절하지 않은 것이다 라고도 하지만 하만이 내가 신이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신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느브갓네살 왕의 신상 앞에 절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상관에게 인사하는 것 당연한 일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내 상관의 출신이 어떠할지라도, 그 사람의 인격이 어떠할지라도 예의를 갖추고 지켜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것은 성경적인 이유나, 신앙의 본질을 거스리기 때문에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집과 아집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만의 출신을 내가 인정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가운데 모르드개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생각, 내 의견, 내 뜻을 하나님의 뜻처럼 생각하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원하는 때, 내 원하는 모습, 내 원하는 방법, 내가 원하는 사람만을 고집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입니다. 문제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신앙의 본질의 문제가 아니면 포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내 고집을 포기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내 고집을 꺾지 않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고집과 아집입니다. 하나님이 절대 기뻐하지 않습니다. 미련한 사람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상관이 있을지라도 지켜야 할 예의를 지키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면 따르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내 고집과 아집을 꺽지 않을 때 문제 생깁니다. 3-4절을 보면 “모르드개가 그렇게 하니 (고집을 꺽지 않으니) 대궐 문에서 근무하는 왕의 신하들이 모르드개를 나무랐다.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지키지 않소? 그들은 날마다 모르드개를 타일렀으나 모르드개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아마 모르드개의 마음에는 이런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내 상관은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의 대적되는 아말렉 사람에게, 악인에게는 내가 절대 절하지 않는다” 로마서 13:1-2 에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것이며 이미 있는 권세들도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요 거역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왕의 명령, 상관에 대한 예의를 자신의 기준과 생각으로 고집을 꺾지 않은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에스더 3:5-6 “하만은 모르드개가 정말로 자기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자기에게 절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화가 잔뜩 치밀어 올랐다. 더욱이 모르드개가 어느 민족인지를 알고는 하만은 모르드개 한 사람만을 죽이는 것은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였다. 하만은 아하수에로가 다스리는 온 나라에서 모르드개와 같은 겨레인 유다 사람을 모두 없앨 방법을 찾았다”모르드개 한 사람이 고집을 부리는 것 때문에 하만은 이스라엘 사람 모두를 다 멸하려고 마음에 결심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순종 때문에 온 공동체가 축복을 받기도 하지만 한 사람의 고집 때문에 온 공동체가 고통을 받습니다. 다윗의 순종 때문에 온 이스라엘이 축복을 누렸지만 사울의 불순종으로 인해 온 이스라엘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모르드개 한 사람이 고집을 부리며 인사하지 않는 사소한 일 때문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 일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이 생긴 것은 하만의 문제보다 모르드개의 고집 때문 아닙니까? 모르드개가 고집을 부리지 않고 인사만 했어도 이런 위기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만의 마음이 넓어서 인사하지 않아도 넘어갈 위인이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더 큰 문제는 모르드개도 하만도 아닙니다. 사실 하만은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지 안하는지도 몰랐었습니다. 그것을 알려 준 사람들은 모르드개와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었습니다. 4절 “그들은 날마다 모르드개를 타일렀으나 모르드개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침내 그들은 하만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그거 아세요 모르드개라는 사람이 당신에게 전혀 인사하지 않는 것을 아세요” 이런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그 사실을 알리면 어떤 일이 생길지 그 사람들이 몰랐을까요? 모르드개가 곤경에 빠진다는 것 뻔하게 알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악한 자들입니다. 그것이 험담입니다. 험담이 무엇입니까?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에 대해 말했는데 상대방이 듣고 말해 준 사람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이 험담입니다. 하나님이 악하다 하는 죄악입니다.
어떻게 되었든지간에 원인 제공자는 모르드개였습니다. 상관에 대한 예의와, 왕의 명령과, 동료들의 조언들을 듣지 않고 말씀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은 일로 인해 결국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죽이는 조서에 도장이 찍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우리 헤이워드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본질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쓸데없는 고집 부리는 것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이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내 생각과 내 고집인지를 깨달아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자가 아니라 머리 숙이고 순종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로운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