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25:13-20
13 며칠이 지난 뒤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인사하려고 가이사랴에 왔다.
14 그들이 거기서 여러 날 지내는 동안에, 베스도는 바울에 대한 고발 사건을 왕 앞에 내놓고 말하였다. “벨릭스가 가두어 둔 사람이 하나 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 유대 사람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발하여, 유죄판결을 청하였습니다.
16 나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로마 사람의 관례로서는, 피고가 원고를 직접 대면해서, 그 고발한 내용에 대하여 변호할 기회를 가지기 전에는, 그 사람을 넘겨 주는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17 그래서 그들이 여기에 함께 왔으므로, 나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그 다음날 재판석에 앉아서, 그 사람을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18 원고들이 일어나서 그를 고발할 죄목을 늘어놓았지만, 내가 짐작한 그런 악한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19 그들이 그와 맞서서 싸우는 몇몇 문제점은, 자기네의 종교와 또 예수라는 어떤 죽은 이에 관한 일인데, 바울은 그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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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동안 사도행전 24장과 25장에서 나오는 베릭스 총독과 그 뒤를 이어 취임한 베스도 총독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 욕심을 위한 전형적인 죄성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공의롭게 재판하여야 할 자리에 있으면서 뇌물을 바라며, 다스려야 할 상황에 불리할 것을 미리 염려하여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서 2년간 바울을 감옥에 가두고, 바울을 암살할 계획대로 행할 수 있도록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낼 것을 권면하는 간교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바로 세상의 모습입니다. 죄된 모습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된 우리들은 그러한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죄된 모습, 세상의 모습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나를 위한 삶이 아닌 예수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명을 따라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정 주를 위해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 모습인지를 지난 토요새벽에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나누었습니다.
예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첫째, 고난 가운데서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아무런 죄 없이 가이사랴 감옥에 2년이나 억울하게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왜 갇혀 있어야 하는지, 얼마나 갇혀 있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허락하심, 선하심을 믿었기에 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겸손히, 온유함 속에 장래의 소망 가운데 기다릴 줄 아는 삶이 진정 예수를 믿는 신앙이요,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둘째, 환경에 의해 영향 받지 않은 비전의 사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복음의 전하는 자로 부르심을 분명히 알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심을 붙들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현실의 상황과 타협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재판을 받는 중에서도 자신은 로마에 가서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말합니다. 어떤 모습, 어떤 상황, 어떤 형편이든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전입니다. 인간의 야망을 가진 사람들은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부르심, 사명을 받은 자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바울과 같은 예수를 위해 살아가는 삶, 예수를 위해 살아가는 믿음인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 환경에 의해 영향 받지 않은 비전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베스도가 바울을 재판 한 후에 다시 감금해 놓은 상황 속에서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는 헤롯대왕의 손자가 되는 헤롯 아그립바가 베스도를 만나러 가이사랴에 왔다가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한 내용과 바울이 변호한 내용에 대해 말하는 장면입니다. 바울에 대해 말하면서 베스도가 헤롯 아그립바에게 19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그와 맞서서 싸우는 몇몇 문제점은 자기네의 종교와 또 예수라는 어떤 죽은 이에 관한 일인데 바울은 그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볼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겠다고 고소한 내용과 바울의 변호를 들어보니 자신이 볼 때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 고소한 내용이 다른 것이 아닌 예수라는 사람이 죽었고 다시 부활했다고 바울이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셋째,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사소한지를 아는 사람임을 봅니다. 베스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는 부활이 사소한 것이 아닌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어찌하여 부활이 없다고 하느냐 만일 죽은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살지 못하고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다” 19절 “우리가 이생 뿐이면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너무 불쌍한 사람입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부활은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것도 타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질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은 내가 정말로 중요하다고 믿는 것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움직여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살면 돈에 매여 살게 되어 있습니다. 자식의 성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자식의 공부와 앞길을 위해서 다 재껴두고 아끼지 않고 투자합니다. 건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비싼 좋은 건강한 음식 아끼지 않고 사고, 시간 내서 운동합니다. 하나님이 삶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예배와 기도, 말씀대로 순종하고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의해 우리의 삶이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벨릭스와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정치가로서 성공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바울을 감옥에 2년간 가두어 두었습니다. 바울을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지 않겠느냐고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편함과 자리가 중요하니까 불법을 행해서라도 해서는 안되는 죄 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무엇이 중요합니까? 무엇을 중심으로 살고 있습니까?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갑니까? 어떤 사람은 가정입니다. 가정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 때문에 가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 자녀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 없이 하는 것이라면, 자신 때문에 신앙을 타협한다면 문제입니다. 자녀들에게도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보다 하나님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내가 가장 중요한 것이 내 삶을 움직입니다. 바울에게는 예수님이셨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에 은과 금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가장 중요한 예수를 준다고 한 것입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포인트입니다. 예수 믿으면 돈도, 가정도, 직업도 다 버려야 합니까? 아닙니다. 돈 버셔야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이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다고 느껴진다면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학업이든, 돈이든, 내 자녀이면 회개하고 나가야 합니다.
말로는 예수 보다 더 없다고 말하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정말이십니까? 정말 중요하면 삶이 함께 따라 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진정 예수를 위해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고 고백하며 그 고백이 삶의 모습 속에서 진정으로 행동으로, 희생으로, 우선의 삶으로 드러나는 고백과 믿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