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누가복음 22:45-51

45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 제자들에게로 와서 보시니, 그들이 슬픔에 지쳐서 잠들어 있었다.
46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들 자고 있느냐?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서 기도하여라.”
47 예수께서 아직 말씀하시고 계실 때에, 한 무리가 나타났다. 열둘 가운데 하나인 유다라는 사람이 그들의 앞장을 서서 왔다. 그는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왔다.
4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인자를 넘겨주려고 하느냐?”
49 예수의 둘레에 있는 사람들이 사태를 보고서 말하였다. “주님, 우리가 칼을 쓸까요?”
50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의 오른쪽 귀를 쳐서 떨어뜨렸다.
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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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사건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바로 전날 저녁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며 자신이 이제 잡히시고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감람산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제자들에게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도하라고 하시고 예수님을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간절함으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시는 것처럼 기도하셨지만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고 잠을 잤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 상황인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기도에 힘쓰지 않는 이유도 우리가 영적으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긴박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키려고 힘쓰고 있기에 기도함으로 깨어 기도함으로 영적으로 무장하고 분별하여 맞서 싸워야 하는데 영적인 잠을 자고 있기에 시험이 오고 어려움이 오면 도망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싸우다가 패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을 자고 있는 제자들을 깨우시면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명하셨듯이 지금도 저희에게 동일하게 “깨어서 기도하라”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이번 고난 주간을 통하여 더욱 영적으로 깨어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셨을 때 예수님의 제자로 택함 받아 3년 반 동안 함께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을 받고 배신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기 위해서 대제사장이 붙여준 무장한 성전 경비병들과 종들과 함께 와서 예수님께 입을 맞춥니다. 아는 척, 친한 척, 사랑하는 척, 위하는 척하는 입을 맞추는 가룟 유다의 입맞춤은 위선의 입맞춤이었습니다. 캄캄한 밤이기에 누가 예수님인지를 알려서 넘기려는 신호였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네가 어찌 입을 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책망하십니다.

위선이란? 거짓을 정직으로 포장하고, 악을 선으로 포장한 것을 말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그 가룟 유다의 위선의 모습이 어찌 가룟 유다 한사람의 모습이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모습 속에는 그 위선이 없습니까? 하나님을 우선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것 같지만 나를 우선으로 사랑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위하는 척 하지만 그 마음에 미움을 품고 있고, 만날 때 웃음으로 인사하지만 그 마음에는 원통함과 원망함을 풀지 않고, 경멸하고 비난하는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유다의 위선된 모습을 보면서 내 안에 있는 위선을 버려야 합니다. 위선과 거짓은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죄입니다. 진실을 포장하고 거짓된 삶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은 몰라도 자신과 주님은 다 아십니다. 위선과 거짓은 결국 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허물이 있다고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간음하고 살인죄를 저지른 다윗 같은 사람도 귀하게 쓰셨습니다. 창녀도, 살인한 강도도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에게 죄를 진 사람들을 얼마나, 몇 번이나 용서하리까?” 라고 물었을 때 7번씩 70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끝이 없는 용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거짓과 위선은 용서 받지 못하고 버림받았습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를 보십시오. 엘리사가 거절한 선물을 자신이 받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면서 나아만에게서 받아 가로 챘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일 없었듯이 거짓과 위선을 보였습니다. 그러했을 때 나아만이 걸렸던 나병에 걸려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거짓과 위선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을 은 30냥에 넘겨 주고, 입을 맞추며 위선된 사랑을 고백했던 유다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행전 1:18을 보면 그는 거꾸러져 배가 터지고 창자가 쏟아져서 죽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모습인가를 리얼하게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나 거짓과 위선을 버려야 한다.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결국 승리합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진실하게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기도 속에 거짓과 위선을 버리고 진실하게 살 수 있는 힘과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진실하게 살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가룟 유다의 입맞춤과 함께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달려드는 성전 경비병들과 대제사장의 종들을 보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호하겠다고 칼을 뽑아 들어 제사장의 종인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짤라 버렸습니다. 우리 같으면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말했을까요? “베드로야 잘했다. 너 밖에 없다.아닌 가룟유다의 목을 쳐라” 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고의 귀를 다시 치료하여 붙여 주시면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을 살다보면 참으로 마음 아프고 힘든 별별 일들을 다 경험합니다. 배신을 당하는 일, 속는 일,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일. 도움을 준 사람이 등을 돌리는 일, 생각지 않게 모함을 당하는 일. 손해 보는 일, 가슴 아픈 일, 분노하게 하는 작고 큰 일들을 수없이 경험합니다.

그러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바로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까지 참으라”고 주신 주님의 명령의 의미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과 일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고, 인내할 수 없는 것을 인내하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재판을 받으시며 침묵하시고, 채찍을 맞으시고, 조롱을 받으시며,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십자가에 달리는 고난과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심도 “이것까지 참으라” 고 하신 말씀을 실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하고 넘겨주기 위해 다가와서, 입을 맞추는 유다를 책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보호하겠다고 검을 빼는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가룟 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여러번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사단의 짓을 하는 그 사람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거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저와 여러분에게 “이것까지 참으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왜 저 사람이 아닌 나에게 참으라고 하십니까?”라고 억울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께서 붙들고 있는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신앙은 베드로와 같이 칼을 뽑아드는, 검으로 하는 것이 아닌,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까지 참아야 할 것들이 각자의 삶에, 각자의 처한 상황 속에 많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분노하는 마음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입니다. 음란한 마음, 간음과 성적인 마음입니다. 악한 습관입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은 즉 우리의 삶 속에서 절제해야 할 것을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절제는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절제는 내 의지로만 되지 않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신 세상의 기준을 넘는 참음과 절제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결단만으로 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절제는 성령의 열매중 하나입니다. 미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보십시오. 술에 중독된 사람들을 보십시오. 마약이나 도박, 또는 폭력이나 절도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것이 잘못된 일임을 압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지 말아야지, 다시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을 하는데 결국 마음이 흔들리고 결국 반복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들은 그러한 양심의 고통도 없이 절제하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 마음을 내가 절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이길 수 없다면 누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합니다. 그래서 절제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님이 충만할 때, 성령님께서 나를 사로잡아 주관하실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한 기도가 바로 그런 기도였습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 내 의지, 내 결단만으로 할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구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는 것 괴롭고 힘들고,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기에 기도한 것입니다. 그렇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기에 그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성령의 충만함으로 내 안에 있는 위선과 거짓, 교만함, 내 힘을 믿는 것을 버릴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신 “이것까지 감당하라” 라고 주신 십자가를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구하는 자가 되어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Category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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