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태복음 3:13-17

13 그 때에 예수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셨다.
14 그러나 요한은 “내가 선생님께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말렸다.
15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 그제서야 요한이 허락하였다.
16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 때에 하늘이 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는 것을 보셨다.
17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하였다.

———————————————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침례 요한에게 가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는 내용입니다. 침례 요한이 남쪽 유대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외치며 그에게 나아온 사람들에게 침례를 준 사건과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은 사건은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침례 요한의 등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놀라움이었습니다.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 후에 약 400년간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인정받는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그 400년간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식민지 생활속에 얽눌림과 고통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답답하고 돌파구가 없는 신음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어느 때 보다 구약에 하나님께서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구원자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할 때 침례 요한이 등장한 것입니다. 유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약대털옷을 입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며 구원의 가까이 옴을 선포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그러한 식민지 생활에서 구원을 받기를 고대하며 자신에게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는 메시지는 그들이 그동안 하나님 앞에 바로 살지 못한 죄와 잘못에 대해 회개함으로 돌이키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침례 요한을 하나님의 선지자요, 엘리야요, 혹은 메시야 구원자로 생각하고 나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가 전하는 말씀을 통하여 죄를 회개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5절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니” 침례는 내가 죄인됨을 인정하는 자들이 받습니다. 그동안의 나의 삶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삶이었음을 인정하고 자백하는 자들이 받습니다.

그렇지 않고 받는 침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침례 요한은 마태복음 3:7절에 침례를 받고자 나온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침례를 주지 않고 이렇게 책망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침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그렇게 침례를 주고 있는 시점에 예수님께서 침례요한에게 나아와 침례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14절 “요한은 “내가 선생님께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말렸다”침례는 죄가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의롭게 살겠다고 결단하는 표시로 받는 것인데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는 분이심을 요한은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예수님으로 침례를 받아야할 대상인데 어떻게 자신이 예수님께 침례를 베풀 수 있냐고 말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신 이유와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첫째,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 있는 우리와 같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신 것은 세상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요한이 예수님을 보았을 때 했던 말이 “세상 죄 지고가는 어린양을 보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례는 자신의 죄를 위함이 아닌 저와 여러분의 죄를 위해서 침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침례 받으신 것은 내가 서야할 죄인의 자리에, 십자가에 예수님이 대신 서 주셨다.

우리에게는 축복이요 은혜이지만 예수님이 받으신 침례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고난의 길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예수님을 3년 반동안 따라 다녔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왕이 되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께 자신들을 예수님의 오른쪽 왼쪽, 즉 가장 높은 자리인 좌정승, 우정승을 시켜 달라고 요청하자 마가복음 10:38절에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침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침례는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시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침례는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겠다는 결단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침례가 그러한 의미가 있음을 기억하고 인생의 분기점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둘째,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6절에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 때에 하늘이 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는 것을 보셨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셨을 때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였고 그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의 사명을 담대하게 감당했음을 우리는 압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은 후에 공생에를 시작합니다. 즉 성령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복음의 사명, 구원의 사명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 영적으로 침례를 받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심으로 우리가 진정 죄를 깨달아 회개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생명처럼 여겨 믿음으로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누가복음 4:18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 성령님께서 비둘기처럼 임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비둘기는 화평의 상징입니다. 온유의 상징입니다. 매처럼, 독수리처럼 임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온유함과 평화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참된 능력은 기적을 행한 것이 아닌 배신을 당하고, 채찍질을 당하시고,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 아무런 죄가 없이 달려 죽임을 당하실 때 저항하지 않는 힘, 묵묵히 십자가를 감당하신 힘입니다. 바로 세상은 할 수 없는 사랑의 힘, 용서의 힘, 온유의 힘, 겸손의 힘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성령의 힘이요 성령의 능력인 것입니다.

성령의 힘과 능력은 위협하거나 비난, 정죄하지 않는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보여 주신 힘입니다. 고통과 오해를 받으나 견디는 힘입니다. 악을 선으로 이기는 능력입니다. 손해와 상처를 입으나 보복하지 않고 감쌀 수 있는 능력입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을 실 때 임하신 성령님이 바로 비둘기와 같이 임한 의미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고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를 낮추고 섬깁니다. 당장은 죽은 것 같고,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고, 당장은 진 것 같지만 마지막 영광을 받고 마지막에 웃고 마지막에 부활하는 이러한 비둘기 신앙과 비둘기와 같은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며 추구하시는 헤이워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신 것은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셨습니다. 17절“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하였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는 것은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 있는 우리와 같이 되셨다는 것이고, 성령이 임하신 것은 비둘기의 온유함의 능력을 받으신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구원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이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서 사역하셨기에 우리가 느끼는 고통과 아픔과 힘듬이 있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나갈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라는 정체성이 있었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었고 넉넉히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녀라는 신분을 분명히 알고 산다면 어떤 일, 어떤 상황, 어떤 어려움, 어떤 고난 속에서도 우리가 담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인 나를 보호하시고, 책임져 주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 순간 외쳐야 할 것이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다. 나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고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자녀다”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 고백하며 담대하게 살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고 목자라고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담대함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라고 불림을 받습니다. 그 약속, 그 말씀을 내 마음을 채우면 두려움도 심지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고 2025년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에 우리의 마음에 나를 향하여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가득 채워 감사와 기쁨, 담대함과 승리함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Category말씀 묵상
Follow 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