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13:1-4
1 안디옥 교회에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나바와 니게르라고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과 더불어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마나엔과 사울이다.
2 그들이 주님께 예배하며 금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위해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내가 그들에게 맡기려 하는 일이 있다.”
3 그래서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한 뒤에, 두 사람에게 안수를 하여 떠나보냈다.
4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이 가라고 보내시므로, 실루기아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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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3장은 첫 이방인 교회였던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바울을 복음 전파를 위해 선교사로 파송하여 보내는 장면입니다. 바울의 1차 선교여행의 시발점이 되는 장면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우리가 알다시피 예루살렘에서 스데반 집사가 순교를 당함과 동시에 큰 핍박이 있으므로 예루살렘에서 도망했던 성도들이 안디옥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여 이방인들이 믿고 세운 교회가 안디옥 교회입니다.
안디옥에 예수 믿는 이방인들이 교회를 세웠다는 말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해서 그 이방인 성도들에게 말씀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예수님의 제자로 살게 합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안디옥 교회 성도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예수 밖에 모르는 “예수쟁이”이라는 이름을 붙여 줍니다.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아가며 안디옥 지역에 복음을 힘 있게 전하던 안디옥 교회가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바나바와 바울을 안수하여 첫 선교사로 보내는 장면이 바로 사도행전 13장의 말씀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세워진지 이제 1년 남짓 된 교회였습니다. 숫자적으로나 재정적으로도 부족한 작은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는 첫 번째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사명을 놀랍게 감당하는 교회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놀랍게 사용하신 안디옥 교회를 살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놀라운 하나님의 복음의 사역을 힘 있게 감당하는 교회와 성도들로 서기를 원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어떠한 교회였습니까? 첫째, 안디옥 교회는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하나님께 드렸던 교회였습니다. 2-3 “그들이 주님께 예배하며 금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내가 그들에게 맡기려고 하는 일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한 후에 두 사람에게 안수를 하여 떠나 보냈다” 안디옥 교회에는 여러 리더들이 있었습니다. 13:1절에 보면 “안디옥 교회에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나바와 니게르라고 하는 시므온,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본붕왕 헤롯과 더불어 어릴때부터 함께 자란 마나엔과 사울이라” 느게르, 루기오, 마나엔, 이런 이름을 아는 분들은 교회 오래 다니신분들 가운데서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이름이 언급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에 있었습니다. 바로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바나바와 바울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이 두 사람이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워서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합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님께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내게 남은 시간, 내가 별로 아깝지 않은 것, 내가 여유가 생길 때 드리는 것이 아닌 내게 가장 중요한 시간, 없는 상황 속에서도, 인간적으로 아깝게 생각되는 물질, 이것 없으면 내 인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들을 하나님께 먼저 올려 드릴 때 후회없는 인생,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것을 드릴 때 왜 갈등이 없겠습니까? 인간적으로 아까운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할지라도 마음으로 결단하여 그것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후회없는 인생, 그 드림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가장 중요한 것을, 중요한 사람인 바울과 바나바를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다음은 책임져 주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인생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것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것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다 쓰고 남는 것 드리지 마십시오. 내가 소중하다고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과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나와 하나님은 그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나의 소중한 것을 나누는 것. 그것이 바로 안디옥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었고, 세계 복음화를 감당하는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행하기 위해 힘썼던 교회였습니다. 2-3 “그들이 주님께 예배하며 금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내가 그들에게 맡기려고 하는 일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한 후에 두 사람에게 안수를 하여 떠나 보냈다”본문을 보면 그들이 주님께 예배하며 금식하고 있을 때 성령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금식이 무엇입니까? 음식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비우는 것입니다. 금식은 육체의 음식만 먹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비우는 것입니다. 대신 하나님의 것을 채우는 것입니다. 내 것을 비우며 하나님의 음성을 채우는 것이 금식입니다. 내 자신을 비우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비우니까 채우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께 예배하며 금식하고 있을 때” 금식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사람을 교회에 보내 주시고 교회에 헌금도 많아지고 넘치도록 채워 주시고, 내 앞에 닥친 어려운 일들이 해결되고 그래야 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금식하며 기도하니까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 바울과 바나바를 보내라는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디옥 교회에게 하나님의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가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안디옥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가 있기 때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떠나도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일군들을 통하여 역사하실 수 있음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누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되고 안되고 하는 곳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지만 내가 있고 없고에 따라, 저 사람이 있고 없고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사람의 있고 없고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따로 세워서 보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럴 때 안디옥 교회가 이 땅 가운데 복음의 사역, 이방인 선교의 시발점이 된 것입니다.
셋째, 안디옥 교회는 편한 곳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에 머문 교회였습니다. 13-14 “바울과 그 일행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로 건너갔다. 그런데 요한은 그들과 헤어져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의 안디옥에 이러르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13장 4절부터 보면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떠나 실루기아에서 키프로스로 그리고 살라미에 이르러 온 섬을 가로질러 바보로 이동합니다. 13-14절을 보면 바보에서 밤빌리아 버가로 버가에서 비시디아로 한곳에 머물지 않고 움직여 나갑니다.
13:4절을 보면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이 가라고 보내시므로 실루기아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배를 타고 기프로스로 건너갔다” 바나바와 바울이 간 곳은 본인들이 원하는 곳으로 간 곳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으로 가는 간 것입니다. 물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계획할 수 있습니다. 바울도 보면 유럽 쪽으로 가려고 했지만 성령님께서 마게도니아로 가라고 하자 갈 곳을 바꿉니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편한 곳, 좋은 곳을 찾습니다. 그러한 곳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사람들은 내가 원하는 곳, 내가 있고 싶은 곳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사는 것이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 원하시는 곳에 있고 순종한다면 어떻게 후회하는 삶을 살겠습니까? 결과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곳에 있으면 후회가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느냐 그곳을 향해 바울과 바나바는 따라 가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이끄시고 인도하신 곳이 늘 편하거나 쉬운 곳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어떠한 곳에서는 환영도 받고 섬김도 받고 복음이 전파되기도 했지만 빌립보에 가라고 해서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귀신 들린 여자를 고쳤더니 잡혀서 매 맞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가라고 하신 곳에 갔더니 유대인들에게 좇겨 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고백을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고린도후서 11:24-29 “유대 사람들에게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번이요 파선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그 밖에 것을 제쳐놓고서라도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넘어지면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 성령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나아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라 하면 가고 서라 하면 서고. 그런데 결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이 편하고 쉬운 곳은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혹시 편한 곳 찾아다니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이 있는 곳이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인지, 뜻이 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3:48-52 “이방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하신 사람은 모두 믿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의 말씀이 그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경건한 부인들과 그 성의 지도층 인사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였고 그들을 그 지방에서 내쫓았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에게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차 있었다”
13장 마지막절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인도하심대로 말씀과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에 또 다시 박해와 어려움이 있어서 그 곳에서 쫒겨 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52절인 마지막절을 보면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고난과 박해가 있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가득찬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 가장 좋은 것을 아낌 없이 드리는 삶, 내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그 뜻대로 순종하는 삶, 주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 내가 편한 곳이 아닌 주님의 뜻이 있는 곳으로 가고 머무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기쁨을 주십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 헤이워드 성도님들이 그러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