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에 있는 죄성과 교만함은 내가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판단하는 것이 가장 옳고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성, 아니 죄성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애씁니다. 무엇을 위한 변화입니까? 상대방이 내 원하는대로 변해야 내가 편하기 때문이 변화시키려는 이유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 기준에 맞도록, 내가 생각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의 기준이 옳고 맞다고 생각하기에 그 기준의 잣대에 맞지 않는 사람을 정죄합니다.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말과 생각을 보면 이런 말과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저 사람 말하는 투가 싫어. 저 사람 하는 행동이 싫어. 너무 늦다. 너무 빠르다. 말이 길다. 짧다…” 이 모든 기준이 나를 기준으로 나보다 늦으면 너무 늦는 것이고 나보다 빠르면 너무 빠른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내 주관적인 이기적인 기준에
변화시키려는 그러다보니 내가 기준이 되고, 나의 잣대로 사람을 보니 대인관계는 ‘판단’과 그 사람이 나와 다른 상태를 싫어하며 ‘정죄’하는 것으로 흐르게 됩니다. 말만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 말이 늦어서 싫어. 말이 많아서 싫어. 말이 너무 없어서 싫어. 말투가 싫어…” 내 기준에 맞게 상대방을 변화시키려고 하는데 잘 안되면 다른 사람들까지 내 편으로 만들어 상대방이 잘못하고 있고 상대방이 변해야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아니면 대놓고 요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내 기준에 맞추기 위해, 내 입맛에 맞게 다른 사람에게 변화를 요구할 때 되지 않습니다. 나는 가만히 있고 상대방을 변화시키려고 하면 되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변화시키려면 나를 변화시키려고 애써야 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들이고 상대방에게 나를 맞춰 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받아주고, 맞춰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내가 먼저 변할 때 어느 순간부터 상대방도 나의 변한 모습을 통해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을 보면 “다른 사람에게 대접 받기 원하는대로 그 사람을 대접해주라. 다른 사람 눈에 티를 보기보다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보고 먼저 빼 내어야 한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다른 사람에게 주장하지 말고 본이 되라” 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있는지 분명한 답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들입니다. 말처럼, 생각처럼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나를 변화시키는 일에 힘쓸 때 함께 변화되는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