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고린도전서 6:1-8
1 여러분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소송할 일이 있을 경우에 성도들 앞에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불의한 자들 앞에 가서 재판을 받으려 한다고 하니 그럴 수 있습니까?
2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세상이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겠거늘, 여러분이 아주 작은 사건 하나를 심판할 자격이 없겠습니까?
3 우리가 천사들도 심판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러한데 하물며 이 세상 일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4 그러니, 여러분에게 일상의 일과 관련해서 송사가 있을 경우에 교회에서 멸시하는 바깥 사람들을 재판관으로 앉히겠습니까?
5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신도 사이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여 줄 만큼 지혜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까?
6 그래서 신도가 신도와 맞서 소송을 할 뿐만 아니라 그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 한다는 말입니까?
7 여러분이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벌써 여러분의 실패를 뜻합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해 주지 못합니까? 왜 차라리 속아 주지 못합니까?
8 그런데 도리어 여러분 자신이 불의를 행하고 속여 빼앗고 있으며 그것도 신도들에게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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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4장에는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편이 나뉘어져서 다투고 싸우는 분쟁의 문제를 다루었고 5장에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음행과 죄에 대한 문제를, 그리고 오늘 6장에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간에 법정 소송을 하고 있는 다툼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해결하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소송할 일이 있을 경우에 성도들 앞에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불의한 자들 앞에 가서 재판을 받으려 한다고 하니 그럴 수 있습니까?”고린도 교회 성도들 사이에 소송을 하는 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돈에 관한 일이거나, 사기, 혹은 명예회손 같은 일들로 인해 세상 법정에 서로 고소하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들간에 서로 법정 소송을 하며 싸우고 있는 모습에 바울은 1절에“성도들 앞에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불의한 자들 앞에 가서 재판을 받으려 한다고 하니 그럴 수 있습니까?”5절에 “여러분 가운데는 신도 사이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여 줄 만큼 지혜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까?”라고 책망합니다. 불의한 자들 앞에서 재판을 받으려 하느냐는 말의 의미는 세상 법정이 불의하다거나, 세상의 법정을 무시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분쟁과 다툼을 법정에서 다루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성도들간에 다툼과 분쟁의 일을 세상 법정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을 책망하는 이유는 법정에서 판단하는 기준과 가치관이 교회와 기독교의 가치관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 세상의 가치관과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가치관과 하늘의 기준으로 살아가야 하는 성도가 세상 가치관으로 판단을 받으려 하는 것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방식으로 싸우고, 이기려는 모습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인에, 세상의 법보다 더 높은 법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하나님의 마음과 뜻, 하나됨과 사랑, 용서와 용납, 희생을 알고 있는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방식으로 세상의 법정에 소송을 해서 내가 옳다는 것을,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권리를 찾겠다고 서로 싸우며 고소하고 소송하는 것 자체가 실패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 “여러분이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벌써 여러분의 실패를 뜻합니다”라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싸우며 소송하는 사람들은 정의를 위해 싸운다고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사실 내 이익, 내 자존심, 내 의를 찾겠다는 육신의 욕심이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러할지라도 성도들은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미혹과 스스로에게 속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간에, 교회가 소송을 하는 경우가 이 시대에도 얼마나 많습니까? 성도간에 소송이 오가고, 목사를 상대로, 교회를 상대로, 교회 안에 편이 갈라져서 목사편, 장로편, 집사편으로 나뉘어져서 한치의 양보와 수용함도 없이 싸우다가 세상 법정에 많은 돈을 써가며 소송을 해서 다시는 연합될 수 없는 원수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교회와 예수 믿는다는 성도들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보고 들으면서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정작 교회와 성도들은 하나님과 복음에 먹칠을 하고 욕을 먹인다는 사실보다 여전히 자신들의 의와 정의, 이익을 위해 싸우고 다투고 소송장이 오가고 세상 법정 앞에서 서로 옳다고 자기 편이 되어 될라고 호소하는 것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5절에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세상 법정에 소송을 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고 성도가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7절입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해 주지 못합니까? 왜 차라리 속아 주지 못합니까?”당해 주라는 것입니다. 속아 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주님께서 하신 일이 아닙니까? 불의에 당해서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었습니다. 속아 주셨습니다. 그것이 지는 것 같도 당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의와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불의에 대해 심판하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기에 세상 가치관이 아니라 하늘의 가치관, 세상의 법과 방식이 아닌 하늘의 법, 예수님의 방식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살리십니다. 세상은 어떻게 하든지 네가 이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네 뜻, 네 의, 네가 옳고, 끝까지 싸워서 이기라고 말하지요. 하지만 주님의 법은 다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세상의 방식과 법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법인 사랑과 희생과 속아줌과 당해줌, 양보함과 손해 보는 삶 속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심과 이루심을 경험하며 살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