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느헤미야 9:18 / 출애굽기 20:3-4
18. 더욱이 우리 조상은 금붙이를 녹여서 송아지 상을 만들고는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우리의 하나님이다’ 하고 외치고, 주님을 크게 모독하였습니다.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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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자유함을 얻어 홍해를 건너 약속받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 광야를 지나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위에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알려 주십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여야 할, 지켜야 할 법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 위에 올라가서 30일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붙이를 모아서 녹여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우리의 하나님이다”라고 외치며 축제를 벌였습니다.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는 행위였고 십계명을 받고 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그 모습을 보고 십계명 돌판을 던져서 깨트리며 그 일로 인해 3000여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가장 큰 죄의 하이라이트가 바로 이 사건이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지 약 3-4개월정도의 시간밖에 흐르지 않은 시점입니다. 3개월 동안 그들은 이집트에서 10가지의 그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보았습니다. 홍해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매일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며 인도함을 받았고 매일 아침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라는 한탄을 금치 못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자세히 살피고 묵상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금송아지를 만들었지만 그들이 이집트의 신들이나 바알신 또는 아세라와 같이 다른 우상을 섬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난 후에 그 금송아지를 무엇이라고 불렀습니까? 17절을 보면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우리의 하나님이다’ 라고 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 즉 이방인들이 섬기는 바알이나 아세라 등의 우상들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를 위하여 어떤 형상도 만들고 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신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첫째 계명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바로 두 번째 계명인 “너를 위하여 어떤 형상도 만들고 절하지 말라”을 어긴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을 주셨을까요? 왜 이 계명을 어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노하실까요?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어떤 형상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어떤 형상으로도 제한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고 믿고 섬긴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성도들이 자신도 모르게 범하기 쉬운 계명이 바로 이 둘째 계명입니다. 둘째 계명의 시작이 이렇게 됩니다. “너를 위하여 어떤 형상도 만들고 절하지 말라”“너를 위하여”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 있는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예배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하나님은 나의 복을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여기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도구로 여기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여전히 내가 세상의 중심이요 내가 삶의 주인과 중심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신앙을, 나의 평함과 안정과, 축복을 얻게 하는 미신적이고 종교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둘째 계명인 “너를 위하여 어떤 형상도 만들고 절하지 말라”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복을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여기는 것,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예배와 신앙생활하는 여러 가지 모습들, 기도, 헌금, 봉사, 섬김의 삶이 나의 의를 위해, 나의 만족을 위해, 누군가 나를 알아주는 것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으로 예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그러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고, 금식과 기도,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위함이 아닌 자신의 의와 만족,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자신을 위한 우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마음의 동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진정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고, 순종하며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도구로 여기고 여전히 나를 위한 내가 하나님 노릇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고 참된 예배자,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